2008년 8월 5일 화요일

보이 명차

보이 명차

복원창호

청나라 때 왕싱에게 바치는 푸얼공차의 차잎은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이 주된 원료였다. 이에 따라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은 청나라 말기 이전의 차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의방차구의 푸얼차 가게들이 무척 흥성하였으나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 고증할 수 있는 차가게의 상호는 오직 송운호와 원창호 두 가게뿐이다.

청나라 중기 이무산의 대엽종 푸얼차 사업이 활기를 띠자 의방차구의 소엽종을 주로 취급해왔던 원창호도 이에 가세해 이무의 상업거리에 분점을 개설하였다. 분점의 이름을 복원창호라 지었으며 이무산의 대엽종 차잎만 취급해 엄선한 차잎으로 만든 푸얼원차를 고급 차인들에게 공급하였고 해외시장으로도 수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접어들어 정세의 불안 및 치안부재, 유행성 질병까지 겹치자 푸얼차를 취급하는 모든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이 때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과 이무의 복원창호 분점도 같은 운명을 맞아 폐업하게 된다.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은 완전히 폐업한 반면 이무차그의 복원창호 분점은 1922년에 다시 개업한 차가게였다.

복원창원차는 동경노호와 쌍벽을 이루는 푸얼차의 극품이다. 차의 묵은 맛을 판단해 보면 동경노호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고, 포장인 죽순 껍질의 재질은 동경노호에 비해 떨어지지만 아주 좋은 재료에 속하며, 묶는 기술도 동경노호의 방법과 동일하다.

내비와 내표의 재질은 모두 오볼라토이기에 대부분 좀벌레가 먹어 완전한 형태는 보기가 어렵다. 또한 내표와 내비의 그림, 글자의 원판은 모두 인장을 새겨서 수공으로 찍어낸 것으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복원창원차는 이무정산 대엽종 차잎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푸얼차이기에 오늘날 중국의 푸얼차계에서는 복원창원차를 가리켜 푸얼차왕이라 극찬한다.
오늘날 의방차구의 원창로 본점에서 생산된 푸얼원차 제품을 볼 수 없으며 이무의 복원창호분점의 푸얼원차만 있는데 이도 또한 극소수의 푸얼차 수장가의 수중에 들어가 푸얼차의 유통 시장에서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동경호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에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립하였다. 동경호는 개점이후 약 200년간 줄곧 용마상표의 내표를사용했는데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1950년 중국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차가게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하자 동경호는 휴업을 선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50년대 폐업 이전의 동경호의 모든 제품은 가장 좋은 이무산의 야생 대엽종차잎, 일쇄, 건창 등 정통 제다법으로 만들어졌기에 오늘날 푸얼차계에서는 최고의 푸얼차로 대접받는다. 동경호의 명성이 커지자 당시 사용했던 용마상표인 내표를 본뜬 위조품이 나돌기 시작했다. 때문에 1920년 8월부터 내표의 모양을 쌍사기도로 변경한다. 따라서 오늘날 1920년 이전 용마상표를 내표로 사용했던 시기의 동경호 푸얼차를 동경노호푸얼이라 부르며, 폐업할 때까지 사용했던 쌍사기도푸얼차는 통상 동경푸얼차라고 부른다.
용마상표로 유명한 동경노호 푸얼원차는 따스한 3월 봄날의 이무산의 2,4,5등급의 어리고 부드러운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는 비교적 넓고 직경이 약20cm, 무게는 340g이며 오랜기간의 저장을 걸치면 차의 겉면은 집은 밤색을 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홍태창호

오늘날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는 홍태창호는 중국 운남성 의방 홍창호가 1930년대 해외 판매망의 거점하나로 태국 방콕에 설치한 지점의 제품이다.

초기 제품은 의방의 소엽종차잎 제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음 모두다 대엽종 푸얼차이다. 초기제품의 차잎은 단단하면서 가늘고 길었으며 차의 새순에 달린 가지의 색은 금황색을 띄우며 차 덩어리의 표면은 반들반들하였다. 우려낸 탕색은 밤색이고 수성은 담백하며 운남성 소엽종 차잎의 야생 청향이 짙게 뽐낸다.

근래 홍콩의 홍태창회사가 운남성에서 푸얼차잎을 수입하여 압제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품은 묵은 푸얼차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므로 선택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송빙호

송빙호 차상점은 청나라 광서 초기에 이무진에서 창립하였으며 많은 양의 푸얼차를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푸얼차시장의 송빙호 푸얼차 제품은 범람할 정도로 많으나 대체로 5%의 진품롸 95%의 가품들이 있다. 그러나 5%의 진품 송빙호푸얼차제품도 질이 무척 낮은 것이기에 건리정송빙호 또는 옛 송빙호시대에 만들어진 푸얼차를 발견하면 푸얼차의 진품 혹은 극품이라 대접을 받는다.

현재 푸얼차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가짜 송빙호 제품 종류는 대체로 5-6가지 된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푸얼차제품으로 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유통하는 것인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 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의 격동기에 생산된 푸얼차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표도 없이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에 운반하여 팔았다. 오늘날 소위 가짜 푸얼차라는 것이 이 시대에 생산된 이름 없는 푸얼차에 유명상표를 붙여 유통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교적 좋은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어 유명해진 맹해차공장에서도 이러한 상표 없는 제품들을 많이 출하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제품을 포장지 없는 녹인이라 부른다.

2)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재배형 관목푸얼차잎의 등장등의 원인에 의해 70년대 이후부터 많은 상인들이 동남아지역의 대엽종 차잎인 변경푸얼 특히 월남의 대엽차잎과 중국 광동성 지역에서 생산된 푸얼산차를 만들었다. 이 때 일부 악덕상인들이 인쇄한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가짜를 진짜처럼 유통하였고, 후일 묵은 대엽종 푸얼차가 선풍적으로 유행하게되자 이러한 제품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3) 홍콩에 설립되었던 송빙호의 지점인 복화호에서도 가짜를 만들었다. 초기에 주로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었으나 후일 중국 공산정권의 정세로 인해 부득이 월남지방의 대엽종 차잎을 구입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남아지역의 변경푸얼로 만들어진 푸얼차가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자 복화호지점은 중국 본점의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속여 팔았다.

경창호

중화민국 초기 경창호 차가게는 운남성 강성지역세서 규모가 제일 크고 이름을 날닌 푸얼차가게 중의 하나였다. 경창원차는 푸얼정산 즉 만쇄차산의 제일 좋은 대엽종 차잎을 채집하여 만든다. 만쇄산은 라오스 접경지역의 위치에 있으며 옛 이무산의 북쪽 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쇄산의 차잎 품질은 이무차산의 다음 가는 으뜸제품이다.

경창원차의 대엽종 차잎 크기는 넓고 크다. 가지 또한 굵고 견실하며 특히 차잎은 마치 차기름에 담가두었던 것처럼 기름진 빛이 가득하고 황금빛의 차순이 발하고 있다. 압축 제조 기술이 정교하고 규칙적이며 가장자리의 두께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덩어리의 표면은 고르다. 덩어리의 직경이 20.5cm이고, 무게는 약330g이다.

가벼운 녹나무 향기에 차맛이 극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워 입안에 들어가면 즉시에 녹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이 푸얼원차 제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다. 각 덩어리에는 내비 한 장씩 있는데 타원형의 도안이며, 동경노호의 내비 디자인과 매우 유사하다.

예로부터 운남성 개인 차가게에서 만든 푸얼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호의 푸얼원차의 제조 공정과 기술이 가장 정교하고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강성원차

1950년대 중국 공산정권 하에 차잎 수매지역에 따라 차잎의 가격을 매겼다. 운남성에서도 이를 따라 차잎의 품질을 통제, 기술 수준의 평등화 등을 통해 공정한 교역이 될 수 있도록 일률적인 가격을 정했다. 이때 강성현, 란창현은 모두 시쐉반나의 푸얼차 수매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강성현에서 자란 차잎은 시쐉반나(西雙版納)의 푸얼 차잎과 대등할 뿐만 아니라 품질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강성원차는 보경원차와 같이 오직 내표만 있고 내비는 없는 푸얼원차이다.

강성원차의 덩어리는 단단하며 직경은 19.5㎝이고 무게는 약 320g이다. 특수한 압축 기술로 인해 덩어리 평면이 고르지 않았고 가장자리의 두께는 녹색을 띄며 고르지도 않았다. 가지 줄기는 납작하고 길었으며 밤색나는 황색 빛깔에 차잎은 반지르하며 윤기가 난다. 전체적으로 경창원차와 매우 비슷하며 대뎝종 푸얼차잎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풍기는 녹나무 향은 비교적 약하나 묵은 청향이 짙어 상쾌한 맛이 난다. 차맛이 비교적 가벼우나 부드러우면서 순하기에 마시고 나면 진액이 생겨 좋은 푸얼차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푸얼차계의 일부 인사들이 강성원차를 가리켜 경창원차의 자매품이라고 말한다. 이는 강성원차도 경창원차와 같이 1930년대에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동흥호

동흥호 차가게의 옛 이름은 동순상호 또는 중신행이라 한다. 1733년 이무진에서 창립되었으며 1921년 전후 동경호와 같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이름을 떨쳤던 차가게였다. 그때 동흥호에서 생산된 푸얼차의 수량은 해마다 약 500담으로 이는 대형의 차가게에 속한다.

오늘날 동흥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권 하인 1921년부터 1934년 사이에 만든 것은 총상 동흥초기원차라 부르며 1934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정권 탄생이전까지 만든 것은 동흥후기원차라고 부른다. 양자의 차잎은 모두 의방차산의 만송다원에서 채취한 소엽종 차잎이기에 품질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동창호

동창호는 1869년 청타라 동치7년에 창립되었으나 청나라 말기 정국 불안으로 인하여 폐업했다.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바뀌고 푸얼차 시장이 점차 안정을 찾자 1921년 전후에 많은 차상점들이 이무차구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이때 새로 창업한 차가게들도 많았다. 그 중 주관보라는 차상인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동창호 차가게를 해로이 설립하여 이무정산의 푸얼차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1931년경 황문흥이라는 상인이 동창호를 인수하고 가게를 운영했다. 주인이 바뀌었어도 계속 동창호라는 상호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다만 원차의 내비의 낙관에 '주인 황문홍이 삼가 올림'이라고 고쳐 썼다.

오늘날 내비의 문구, 디자인의 색상에 따라 동창호 푸얼원차는 세 가지로 나눈다. 동창원차, 동창황기남원차, 동창황기홍원차 등이 그것이다. 1949년 경 황금당씨가 동창호를 인수할 때 상호를 동창황기라고 고쳤다. 이때 원차 내비의 디자인 도안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색의 내비, 하나는 붉은 색의 내비로 만들었다.

남색 내비의 낙관에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찍혀있는 것을 동창황기남원차라고 하고, 묽은 색 낙관에 같은 내용의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동창황기홍원차라고 말한다. 양자는 모두 약 50년 정도 묵인 푸얼원차이다.

전기의 동창원차의 덩어리는 두텁고 짙은 밤색을 띈다. 가지 줄기가 납작하면서 길고 흰 솜털인 백호는 거칠면서 두텁다. 줄기와 차잎이 정렬하게 혼합되어 있어 좋은 푸얼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동창원차는 다른 동창호 원차에 비해 겉 표면의 윤기가 좋다.

후기의 동창황기남원차의 외관은 전기의 동창원차와 아주 비슷하다. 빛깔과 윤기도 대체로 같으며 다만 가지 줄기가 좀 가늘고 차잎이 약간 마르게 보이므로 동창원차보다는 질이 떨어진 제품이다.

양빙호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양빙호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빙호를 소개하는 이유는 양빙원차는 의방차구의 소엽종으로 만든 푸얼원차이기 때문이다.

푸얼차를 논한다면 운남성 [6대차산] 즉 [이무차구-易武茶區]를 빼놓고는 애기 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6대차산]이란 西雙版納 내의 攸樂, 革登, 莽芝, 蠻專, 漫撤, 依邦 등의 차산을 말한다.

그러나 원, 명,나라부터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운남성의 6대차산의 이름은 오늘날과는 다르다.
이 시대에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이무산, 우곤당산 절반과 만랍산 절반을 합쳐 5대차산이라 했고, 후일 유락산 일명 공명산과 다시 합쳐 6대차산이라 불렀다. 이 중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우곤당산 절반의 차산 등 전지역을 가리켜 의방차산라고 한다.

의방차산은 운남성 내에서 제일 먼저 소엽종 차잎을 재배한 차산이다. 운남성의 소여종 차잎은 명나라 말기 사천성 다농들이 이곳 의방차산으로 이주해 올 때 소엽종 차씨를 가져와 재배했던 것이다.
의방의 소엽종 차맛은 대엽종 푸얼의 진하고 두터운 맛의 특성을 가지면서 소엽종의 청향을 겸해 뒷맛이 달고 매끄럽다. 또한 여린 것이 늙은 것 보다 향기롭고 새것이 묵은 것 보다 진하며 싱싱한 것을 물에 울구어 마시기가 가장 적합하다.

양빙원차의 덩어리는 여타 푸얼원차 보다 비교적 작은 편이다. 직경이 19㎝이며, 무게는 약 280g이다. 매 덩어리마다 5×6.8㎝의 가로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묽은 글씨로 되어있다. 덩어리 표면의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었으며 윤기가 나는 누른 싹도 보인다. 차탕은 청향이 나고 차맛은 진하지 않으나 약간 신맛이 섞여 있어 의방 소엽종 푸얼차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푸얼원차이다.

홍인원차

홍인원차를 논하고자 하면 범화균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40년에 운남성 불해에 임시로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들들로부터 품질 좋은 야생차잎을 사들여 처음으로 푸얼원차를 제조하였다. 그중 시험적으로 제조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홍인푸얼원차와 녹인푸얼원차 등 푸얼차제품이다.

이 때 원차의 겉면 포장지의 정 중앙에는 8중차(8中茶)표시 즉 가우데의 차자는 8개의 중자로 둘러 쌓여 이었으며, 포장지의 가장자리 위쪽은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 아래쪽은 중차패원자라는 글자를 원형으로 배열하여 표기했다. 차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지방의 차잎으로 만들어진 원차의 차자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이라 했고,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차잎으로 제다한 원차의 차자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녹인이라 불렀다.

홍인푸얼원차는 40년대 국민당정부에서 생산된 초기홍인과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초기홍인은 이무차산의 최고품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이 품질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진짜 홍인푸얼원차의 차잎은 크고 알차며 줄기 또한 포만하고 차잎 표면이 반들반들한 윤기가 나며 색깔은 붉은 밤색이다. 우러난 탕색은 붉고 선명하며 맛은 매우 진하고 난초향기와 야생 녹나무 향기가 배어있다. 차찌꺼기는 연하고 싱싱하며 마치 두꺼비 껍질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구식의 나무모형으로 압축하여 제조했기에 중아부분이 부풀어 배꼽이 있는 것 같으며 8중차의 내비는 완전히 차 덩어리의 속에 묻혀 출하되어 있다.

한편 수량이 많지 않은 홍인철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소홍인이라 한다. 50년대초 공산정권의 운남성 하관차공장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개향식 금속 압축모형으로 만든 푸얼원차이다. 차잎 원료는 멀리 맹해 차공장에서 고급 차잎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생산되 푸얼차의 이름은 원차철병이다. 원차철병의 품질은 초깅홍인과 후기홍인 사이에 있고, 차의 향기는 초기홍인의 난초 향보다는 후기홍인의 야생 녹나무 향을 더 빼었다. 이에 따라 원차철병은 맑은 녹나무 향기가 물신 풍긴 대표적인 푸얼차 제품으로 자리잡는다.

녹인원차

녹인원차도 홍인원차와 마찬가지로 차 겉면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의 차자가 푸른 색이이기에 녹인이라 부른 것이다. 역사는 홍인과 같기에 40년대에 생산한 초기 제품과 50년대 이후에 생산한 후기 제품 등 두 가지로 나눈다.

초기녹인원차는 맹해 일대에서 나는 차잎으로 만들었다. 사모에서 파달흑산일대까지에서 생산된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차잎 원료의 질은 매우 좋다. 이무와 맹해에서 수거된 차잎 중에 으듬의 차잎은 갑급이라 정하고, 그 다음은 을급으로 나누어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녹인갑을워차 또는 남인푸얼원차라 불려지는 초기녹인은 녹나무 향기, 차의 묵은 맛은 상당히 좋으면서도 불구하고 시중의 가격은 홍인의 절반값에 유통되었다.

후기녹인원차는 50년대로부터 6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맹해차공장에서 만든 모든 푸얼차는 녹인상표의 표지를 달았기에 상당한 수량의 푸얼차가 생산되었다. 후기녹인은 그 차잎과 품질면에서 매년 수매한 차잎의 품질과 각 지방의 차잎의 질이 서로 다르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녹인원차의 명칭은 운남칠자병차라 바뀌었고 이에 따라 녹인원차의 상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이 1973년에 푸얼차의 쾌속진화 퇴적발효 제조공정 기술인 습창법의 연구가 성공되자, 칠자병차는 여러 등급의 관목형 차잎을 섞어 습창법으로 숙병을 만들었다.

포장지 없는 녹인은 50년대와 60년대 사이 20년간은 중국공산정권 사회에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특히 50년대 초반 때에 많은 무명 푸얼차 제품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생산방식에 따라 이 시절 출하된 푸얼차는 모두 나라의 재산이기에 상표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포장지를 절약하는 취지아래 포장하지 않은 채로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로 운반하여 팔았다. 맹해 차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자녹인원차는 포장지 없는 녹인의 후속제품으로 맹해차공장에서 50년대 초반에 출하되었다. 사용했던 차잎은 대체로 좋은 것이었으며 제조공정도 청병 방식에 건창법으로 만들어졌다.
소자녹인원차는 오늘날 자료도 기록도 없는 일정량이 유통되고 있다. 제품의 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며 야생 교목에서 자란 차잎으로 만든 청병에 건창법으로 저장되었기에 소자녹인원차는 자연적인 차향이 많이 나는 신선한 좋은 푸얼차라 할 수 있다.

황인원차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을 생산했던 시기에 포장지의 중차패 차자가 누른 색으로표시된 푸얼차 제품이 있었는데 후일 이것을 황인원차라고 부른다. 이때 생산된 황인원차 제품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덩어리가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대황인이라 하고 작은 것은 소황인이라 한다.
황인원차의 특징은 기존 다른 원차는 한 가지 차잎으로 만드는데 반해 황인원차는 여러 등급의 차잎으로 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차를 개조차라고 한다. 크고 둥근 것은 긴단차라 하고, 낙고 둥근 것은 여아차라 한다. 장사꾼들은 덩어리차의 겉표면을 등급이 좋은 부드러운 차잎으로 사용하고 속은 쇠고 거친 차잎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개조차라 한다.

황인원차의 제조 배합의 비율로 보면 늙은 차잎에 일정한 양의 어린 싹을 섞는 것이 특징이다. 황인원차의 표면에 유난히 많은 어린 차일 싹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런 싹두들이 진화를 거쳐 대부분 금황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황인원차의 덩어리 표면의 특징은 다른 원차보다 누른 색을 더욱 띄는 것이다.

황인원차는 비록 구식의 모형 압축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덩어리는 의외로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또한 제조 공정 중에서 어느 정도의 발효를 거쳤기에 푸얼차의 원래 향기가 소실되어 차성은 푸얼숙병의 특색이 있다. 희미하게 녹나무 향기가 남아있으며 수성이 부드럽고 달며 뒷맛 또한 달고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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