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5일 화요일

보이차 역사

◈ 상고시대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운남에 살던 복족 사람들은 차를 심었고 차 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시초이다. 문헌에는 복족 사람들이 상왕(商王)에게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나라때 이미 복족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촉(蜀)의 군대를 전부 얻었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모두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파촉지사(巴蜀之師)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사람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운남은 차의 고향이며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 사람들이 이미 차엽을 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당시에는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것은 상주시기에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것과 일치한다.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보면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에게 인장을 하사하였으며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을 다스렸다. 삼국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다(茶)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선(選)이라고 부르며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산릉선에서 난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따서 말리운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다(茶)자는 글자의 뜻에 따르면 곧 차잎이어서 운남이 한(漢)나라 시기에 차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선사하였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고있다. '다산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고 다섯산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사자로 선사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제사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諸葛) 공명(孔明)으로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러 지금의 운남성 서쌍판납자치주, 맹해현의 남유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중에서 일찍 5월에 노수(지금의 금사강)을 건너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곧 진남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의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하나인 소수민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를 보면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선한 것이어서 이민족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것들은 원래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보이차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을 때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반작이 외교사절로 운남의 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만서(蠻書)]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지역의 여러 산에서 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 는 기재가 있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은 지금의 운남성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가 생산되었고 또 5백여리 거리밖으로 판매 공급되어서 이해 부근의 몽사 지금 운남성의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마신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엽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업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은생성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엽 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로 부터 은생성의 차는 마땅히 운남의 대엽종차의 종류이여야 했다. 그것은 대엽종차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의 종자이고 보이차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에서 나는 차엽은 당연히 보이차의 선조이어야 한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는 같아서 당나라때 은생성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길'이라고 교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 책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엽은 고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때부터 시작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당,송시기의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 역사의 가도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엽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외에 더욱 중요한점은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차엽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거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수 있으며,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움직일수 없는증거가 된다.

◈ 송대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말과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도로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남쪽끝의 이무진(易武鎭)으로 부터 북쪽으로 가서 보이진을 거치고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그러한 운남지 경내를 지나는 것을 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다시 석고진으로부터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차의길 주변에는 많은 성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엽의 제일 중요한 집산중심지로 개척 되었고, 점점 상인들로 하여금 운남차엽과 보이부가 상인들에 의해 밀접한 관계를 맺으므로써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경내의 키큰 차나무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의 제품은 모두 보이차라고 통칭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 원대

원(元)나라는 중국차 문화의 전수, 계승의 기복, 전환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의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말하면 원나라는 중요한 시기이다. 관습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로 선사하였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는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올라가면 어느 그루 차나무의 차잎인가에는 관계없이 운남대엽종차종자의 후대일 것이며 다시 말하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는데 그 실물은 있으나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부터 그 진짜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로 되었다.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때부터 진짜이름으로 역사에 써넣을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러서 다시 보이차의 이름에 근거를 얻게 하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 이지역에서 시장매매하는 필수상품 이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이 때부터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의 사조제는 그의 진략중 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보차의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이는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는 그가 쓴 원고 중에서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가 기원 1664년에 출판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서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것을 참고 할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인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시키라 하고 1391년에는 용단(전문적으로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바치라고 하는 최상품 차를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 순수하고 소박한 사회적 민풍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만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이 운남에서 발생되어서 운남과 서역 사이를 빈번하게 대상들이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왔으며. 교환한 차잎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운송하였다.

◈ 청대

청의 보이차는 많은 변화를 겪으며 귀중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공다(貢茶)로서 황실의 총애를 배로 받는 최상품차로 되어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부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공다는 보이현 서문산 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수도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 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 보이다고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는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되었으며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보이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거의 200년 동안 마셔왔다.청의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제일 진하며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다고 기록하였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의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 자연히 보이차를 만드는 상점이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등 차가게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최고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다산을 드나 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다산의 차의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다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 현대

중화민국(民國)이 건립되면서 본래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를 재정비하고 지난날의 위풍을 회복 할 수 있었는데, 처음 운남성 정부에서는 차잎에 대하여 정부가 관리하고 민간에서 경영한다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지방정부에서 관리를 배치하고 세금을 받게 하였으며 차상인 들이 가게를 차리고 차를 만들게 하고 민간에 운송하여 판매하게 하였다. 이것은 보이차의 생산, 판매, 경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수한 보이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중에 있다.

◈ 역대 보이명차

유명생산지로는 운남성 일대이며 특히 운남 서쌍판납의 6대다산 에서 생산된 차가 유명하다. 우량품종으로 운남 대엽종이 이용되며 신선한 잎을 채취하여 살청 하고 비빈 후 퇴적하여 곰팡이 균을 이용해 발효 가공하거나 다시 증기로 쪄서 압력을 주어 재 가공한 긴압차가 있다. 긴압차의 형태로는 사발 모양의 타차, 버섯모양의 긴차, 원형인 병차와 칠자병차, 벽돌모양의 전차가 있다. 현재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가장 오래된 청대의 금과공다가 있고 최근에는 쉽게 접 할 수는 없지만 일부 수장가들에 의해 보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역대 보이 명차들이 있다.

◇ 금과공다(金瓜貢茶)

'여름에는 용정을 마시고 겨울에는 보이를 마신다'는 궁전 속담이 있듯, 청대의 최상품차는 보이차였다. 최상품 차로서의 보이차는 모두 어린 새싹의 여아차(女兒茶)로 만들어지는데, 여아차란 이족(夷族)의 미혼소녀들이 딴 아차(芽茶)를 먼저 옷속에 넣은 다음 일정한 수량으로 쌓인 후 대나무 광주리에 꺼내 놓는 차를 말한다. 여아차로 크기가 서로 다른 대, 중, 소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는데, 큰 것은 사람의 머리모양 같아서 인두차(人頭茶)라고도 불리어졌다. 1963년 북경고궁에는 청나라시대 만들어진 2톤 남짓의 보이공다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보존이 아주 잘되어 변질되지 않았으며, 약간을 끓여보니 탕색이 있고 차의맛이 깊고 담백하다고 하였다. 중국정부는 많은 보이공다를 부순후 기타 다른 보이차속에 섞어 팔았는데 비교적 큰 금과형 공다를 유일하게 남겨서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보존하였다. 이 금과공다는 다청이 굵고 단단하며 약 100년 전후가 된 차이다.

◇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

청 중기 보이차는 이무산(易武山)과 의방다산(倚邦茶山)의 차 품종이 으뜸이었다. 의방다산은 보이공차를 만드는 소엽종의 차이고 이무산은 오래 묵을수록 향기로운 대엽종 보이차의 품종이었다. 광서(光緖)중기 이무진과 의방다구 사이로 도로가 연결되어 이시기 차를 파는 상인들은 대부분 두 곳의 차산지에 동시에 차 공장을 설치하였다. 광서(光緖)초년에 창설된 원창호 역시 광서 중기 이무 큰 거리에 차 공장 분점을 개설하고 복원창호 차가게라고 이름짓고 이무산의 대엽종 보이차엽을 전문적으로 사용하여 정선하여 만든 제품을 제조하여 국내와 해외에 판매 하였다. 그러나 광서 말년 운남 남부의 모든 차가게와 차공장이 지방의 치안부재와 질병유행으로 휴업하였는데 의방의 원창호와 이무의 복원창호도 마찬가지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원창호는 폐업하고 이무의 복원창호는 민국 10년 전후에 다시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복원창원차는 광서년간에 제조한 백년전 보이차로 제일 우수한 대엽종 보이차청을 채취하여 만들어 차엽이 두텁고 크며 가지가 넓고 엷으며 밤색에 차기(茶氣)는 강하여 이무산 보이차의 특성을 충분히 가졌는데 남색 내비로 포장된 차는 비교적 양기(陽氣)가 강하며 백색 내비로 된 차는 여리고 부드럽다. 현재는 당시의 원창호 보이차는 볼수 없고 복원창호 보이원차가 남아서 일부 수장가에게 보관되고 있다.

◇ 동경원차(同慶圓茶)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치하였는데 공장규모가 크고 산량도 아주 많았으며, 그 역사도 오래되어 200여년을 자랑하였다. 동경노호로 대표되는 용마(龍馬)상표의 내표, 내비는 200년을 사용한 후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그 후 중국정부가 운남의 모든 차가게를 국유화 시킬때 휴업을 하였다. 동경호차가게의 보이차는 당시 품질이 가장 좋은차로 알려졌다. 동경노호의 용마상표 원다는 종류가 많았는데 시장에서 살수 있는 제품들은 제일 오래된 2.3종의 보이차 제품중 하나이며 그 차의 햇수는 근 100년에 가깝기 때문에 차를 파는 상인들한테서 청말기 국보급의 백년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동경노호원차는 매 하나의 통마다 죽순껍질 포장이 되어 있는데 이런 죽순껍질은 운남의 큰 대나무의 죽순줄기 겉껍데기에서 생산된다. 운남은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가 굵고 단단하며 죽순과 죽순껍질이 크면서 인성이 특히 강하다. 또한 죽순껍질의 섬유는 강인하고 내구력이 있어 못쓰게 되거나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으며 동시에 습기를 방지하고 잡 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어 보이차를 포장하는데 제일 적당한 재료로 근 100년이 된 보이차지만 완전하게 보관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 경창원차(敬昌圓茶)

경창원차(경창호)는 만새다산의 제일 좋은 차잎을 채집하여 만들고, 대엽종 차나무이며 가지는 비대하고 차잎의 크기는 넓고 크며 기름지고 황금빛의 솜털이 있다. 만새다산은 라오스 변경에 위치하는데 차의성질은 이무다산 다음이다. 모든 민간 차 가게들은 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원차(경창호)의 제조공정과 기술이 가정 정교하고 우수하다고 추천한다. 병차의 직경이 20.5cm 이며 무게는 약 330g으로 녹나무 향기가 나고 보이차 제품중 가장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민국 30년대 제품이다.

◇ 강성원차(江城圓茶)

강성원차(강성호)는 강성현의 보이차 제품으로 대표적인 강성의 보이차로 경창원차와 강성호 보이원차가 있다. 직경 19.5cm, 무게 약 320g으로 가지는 납짝하고 길며 빛깔은 밤색이 나는 황색이고 차청은 반지르하다. 대엽종이며 약한 녹나무향이다. 경창원차의 자매차로 민국 3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고, 마시면 느낌이 새롭고 그 내표의 그림과 문자에 오성이 그려져 있거나 "포장을 참답게 하고 경제를 번영 시키자" 는 어구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적 색채를 보아 5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다.

◇ 양빙원차(楊聘圓茶)

양빙호(楊聘號) 차가계는 대략 민국10년 의방진의 큰 거리에서 개점하였다. 그러나 언제 폐점 했는지는 자료가 없고 다만 10여개의 원차만이 남아 있어 양빙호 차가게의 역사적 증거물이 되었다. 직경 19cm, 무게 약 280g 이며 매 병(餠) 마다 5 x 6.8cm의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된 문자 속에는 양빙호등 33자가 적혀 있다. 병차의 표면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으며 누른 싹이 반지르르 하다. 차탕은 맑고 담박하고 약간 신맛이 나서 전형적인 의방 소엽종 보이차의 특성을 지닌다.

◇ 동흥원차(同興圓茶)

동흥호(同興號)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동흥초기원차로써 민국10년부터 23년 사이의 제품이고, 다른 한가지는 동흥 후기원차로써 민국 23년부터 38년 사이의 제품이다. 두가지 모두 의방다산의 차제품이며 차공장에서 나온 기간이 근 20년 간의 차이가 나지만 두 가지 차의 성질이 서로 같아서 동흥호 차가게의 상품관리가 아주 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창원차(同昌圓茶)

동창호(同昌號)는 1869년에 창립되어 청나라 말기에 폐업하였다. 그후 상인인 황문흥(黃文興)이 차가게를 인수받아 운영하였는데, 동창호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다가 민국 38년에 동창황기(同昌黃記)로 바뀌면서 주인인 황문흥도 황금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문흥의 동창원차, 동창황기람(藍)원차, 동창황기홍(紅)원차가 있다.

◇ 정흥원차(鼎興圓茶)

정흥호(鼎興號)의 차가게는 고급 보이차를 생산하여 유명하였다. 현재 이 가게의 남겨져 있는 제품은 많지 않다 원차 세 가지와 긴압차가 있는데, 원차는 내비의 색깔로 구분한다. 원차의 내비 색깔은 붉은색, 남색, 자색의 서로 다른 세 가지 글자색인데 붉은 색과 남색의 글자로 된 내지가 있는 두 가지 원차는 품질이 비슷하며, 경미하게 익힌 차청으로 야성(野性)의 녹나무 향이 있고, 보이차 중 가장 진한 차 향기를 지닌 맹해 주위의 소엽종 다원에서 나온 것으로 유락산남산(諛樂山南山)기슭 일대의 소엽종 차청이다. 자색의 글자로 된 내비가 있는 것은 원차의 품질이 앞의 두가지 차보다 떨어진다. 정흥원차는 맛이 담백하고 약간 신맛을 띠고 차찌꺼기, 수성(水性)으로 볼 때 의방보이차의 특색으로 볼 수 있다.

◇ 정흥긴차(鼎興緊茶)

불해(佛海)지구의 정흥차 가게에서 생산한 것으로, 불해는 지금의 보이차 생산 중심인 맹해이고 정흥 차가게는 1949년전의 상회이며 운남에서 명성이 있었고 지금도 이 차가게에서 만들었던 좋은 원차들이 남아 있다. 긴차의 표기에는 별과달의 그림이 있고 당시 생산된 제품은 서북성에 운반되어 이슬람교의 변강 민족에게 팔렸고 동시에 영문으로 써서 먼 중동의 회교도 국가에까지 운반되었다. 탕색은 짙은 밤색이며 차가루가 얼마간 있어 차를 우려 마실 때는 여과 시켜야 한다. 수성이 순수하고 두터우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감각이 있고, 찻물이 입에 들어가면 두텁고 유순하며 짙고 매끌매끌하며 순수하고 달콤하며 상쾌하다. 차향은 침향 향기가 짙고 그 속에 담박한 녹나무향기가 있다.

◇ 맹경긴차(맹景緊茶)

맹경긴차는 맹농(맹弄)지방의 맹경 차가게에서 생산한 제품이다. 맹농은 운남성 보이진(鎭)의 동북방향에 있는 맹농촌 인데 맹고(맹庫), 봉산(鳳山)과 더불어 운남성 중부의 차산지이다. 맹경긴차는 늙은 차나무의 쇄청한 생엽 으로 만들며 건조한 창고에서 오랫동안 저장한 것으로 차 덩어리는 이미 말라 터져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되었고 어떤 것은 껍질이 말라 떨어져 있다. 무게는 200g정도이고, 우려내면 향기롭고 잡냄새가 없으나 늙은 차청이라서 오랫동안 우려 낼수는 없다. 탕색은 붉은 밤색이며, 비교적 가루가 많아 우려 낼 때 여과시켜야 한다.

◇ 반선긴차(班禪緊茶)

대리(大理)하관에 차 공장을 건설한 주요 원인은 보이차를 티베트등 서역 지구에 운반하여 판매하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차 마시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어 있는데 순수하고 짙은맛이 나며 강한 생긴차(生緊茶)가 그들의 식 습관과 어울렸다. 그러나 70년대 쾌속 발효제다 공정의 연구가 성공한 뒤로 그러한 맛의 보이차 맛을 잃어 버렸는데 1980년 10월 20일 티벳 종교 지도자 반선이 친히 하관의 차공장에 와서 참관하고 옛 보이차 맛을 아쉬워 하자 하관 차공장에서 반선을 위해 한차례의 생긴차를 제조하여 '보염패(寶焰牌)'라는 내비를 붙여 생산하였다. 티벳 외의 대외 판매는 하지 않았으나, 몇 년 지난 후 재고품이 소량 남아 있다가 일부 수장가들에게 판매 되었다. 반선긴차는 새 차나무 관목의 2급 아래 차청을 사용하였고 차 덩어리가 매우 단단하며 덩어리 표면은 짙은 밤색이고 속은 푸른 밤색이다. 푸른잎의 향기를 보존하였고 수성이 엷고 날카로우며 쓰고 떫은 전형적인 생보이차의 제품이다. 나중에 티벳트 지역의 요구에 따라 80년대말에 「운남성차수출입공사」하관 차공장에서 육속 화염패(火焰牌) 반선긴차를 제다하여 서북지구에 공급하였고 현재 하관 차공장에서 일정한 수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 가이흥전차(可以興茶)

1926년에서 1941년 사이의 차 가게로써 현재 보이전차만이 남아 있다. 가이흥전차(可以興茶)의 의의는 전차의 무게가 10량전 이라는 실물의 표본이며, 보이차청으로 이름난 이무다산과 불해다산중 보드랍고 검은 가지를 지닌 최상의 불해 보이차청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보이전차의 역사를 1967년부터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가이흥호 전차를 보면 초기에도 전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홍인(紅印)

1940년대에 범화균(范和鈞)선생이 중국다업공사에 초빙되어 맹해에 차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간에서 차청을 사들여 몇 가지 보이차를 시험 제다 하여 성공하였는데, 그중 홍인보이원차가 있다. 홍인은 글자 그대로 붉은 인기(印記)이다. 차 덩이의 겉면 종이 정면에 '8중차(8中茶)의 중차공사(中茶公司) 표지가 찍혀있고 가운데 붉은 색으로 된차(茶)자가 찍혀 있어 이후 속칭으로 홍인 이라 불리었다. 홍인보이원차는 범화균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맹해 일대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200여년의 보이 최상품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정세의 불안정과 중국인민공화국의 건립으로 숙원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사실상 현대 보이 최상품차이다. 홍인은 1940년대 만들어진 초기홍인과 1950년대 만들어진 후기 홍인이 있다. 초기홍인은 어린 차청을 사용하였으며 난초 향기가 있고, 후기홍인은 중장년급의 차청으로 만들었으며 짙은 녹나무 향기가 있다.

◇ 녹인(綠印)

녹인보이는 홍인보이와 마찬가지로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 표기의 가운데 찍힌 차(茶)자가 녹색이라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홍인의 자매 제품으로 40년대 초기녹인과 50년대 후기녹인의 두 가지가 있는데. 범화균 선생이 맹랍지방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홍인을 만들고 다시 맹해 부근의 좋은 차청을 사들여 녹인을 제다 하였다. 초기녹인을 '홍인갑을원차' 혹은 '갑을녹인'이라고도 하는데 초기홍인 보다는 그 맛이 떨어지나 후기홍인 보다는 부드럽고 떫지도 않다. 후기녹인은 '포장지 없는 녹인' '대자녹인(大字綠印)' '소자녹인(小字綠印)'등 세 가지이다.

◇ 황인(黃印)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 이외에 중차패 표지 가운데 차(茶)자가 황색인 제품이 있었는데 이것이 황인원차 이다. 덩어리가 큰 대황인과 덩어리가 작은 소황인이 있다. 황인은 현재 칠자보이병차의 전신인며 배합차청 보이차 제품의 시작으로 제다 과정 중에서 상당한 정도의 발효 효과를 내며, 덩어리를 단단하게 압축하였다.

◇ 원차철병(圓茶鐵餠)

50년대 초 중국 차엽 회사에서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판매를 확대하는 계획을 세워 차 교역을 확대하게 되자 하관 차 공장에서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공장 건설을 증축하였고 전통적인 보이차 압조 기술을 개선 하기 위하여 전부가 금속으로 만든 압축 모형을 설계하여 개량하였다. 이 새로운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특별히 맹해 차 공장의 차청을 가져다가 처음으로 원차원반을 압축 제조하였다. 그러나 이 원차원반은 덩어리가 너무 단단하여 쉽게 발효되지 않아 이후 새로운 금속모형의 생산을 중지하였고 이 때 생산된 원차원반은 하관 차공장의 전무후무한 원차원반 제품이 되었다. 같은 년대의 다른 차보다 발효 속도가 느려 새로운 맛이 나며 신선하고 달콤하며, 향기는 맑은 녹나무 향기가 난다. 건조한 창고에서 변질되지 않은 것은 차 덩어리 표면이 고르게 금황색을 띠고 반들반들 윤이 나며 차 덩어리의 가장자리는 일부분이 떨어져서 울퉁불퉁 하다. 변질된 차는 표면이 어둡고 진한 색이고 반들거림이 부족하며 차 덩어리가 평평하고 가장자리가 균일하고 단단하며 두텁고 덩어리를 쪼개어보면 속층에 검고 푸른곰팡이가 있다. 덩어리가 느슨한 편이고 검은 밤색이 나며 깨져 떨어져 있는 것은 습기찬 창고에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 칠자철병(七子鐵餠)

'칠자원반'이라고도 하며 60년대 초기 곤명 차 공장에서 천주머니로 된 압축 모형 기계를 바꾸어 하관의 원차원반처럼 전부 금속으로 된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칠자원반보이차'를 압축 제조하였다. 칠자원반은 내비와 통포장이 없으며, 차청은 곤명 일대의 차청으로 추정되고 차 찌꺼기로 보아 중장기에 속하며 품질은 좋고 차의 가지는 길고 가늘고, 균일하며 생차 제다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탕색은 검은색이고 수성은 두텁고 매끌매끌하며 뒷맛이 달고 물맛이 짙으며 차의 기는 강하고 담박한 녹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나쁜 부이차

보이차는 원래 몸을 따뜻하게 하고, 독기를 풀며, 풍을 몰아내고, 몸을 정상적으로 돌리는데 매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차입니다.

좋은 색, 향, 맛과 더불어 좋은 기(氣)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① 좋은 차엽으로 제대로 발효가 되어야 하고, ② 좋은 상태에서 보관되어야 합니다.

위의 조건을 모두 갖춘 보이차를 "제대로 된 보이차", "정상적인 보이차" 혹은 "진정(眞正) 보이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중국, 대만, 우리나라에서 위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보이차가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보이차가 아닌 보이차를 가짜 보이차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렇게 위조품이 대량 유통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차 보이차의 경우 20년을 넘어 50년정도까지 발효시키는 것이 있는데, 이처럼 연도가 오래되면, 높은 가격을 받고 팔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보이차는 값이 말할 수 없이 비쌉니다. 동경호나 송빙호와 같은 골동차는 말할 것도 없이 조기홍인원차와 같은 인급차도 대만이나 홍콩에서 150 ~ 200만원에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짜가 대량으로 제조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만에서 동경호 500편을 조사해 봤더니 그 중 14편만이 진품이었다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보이차를 위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훨씬 싸구려 차를 가지고 껍질만 바꿔 싼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무지녹인( 이 차도 요즘엔 정말 비쌉니다.) 같은 차에 송빙호 포장을 해서 송빙호라고 파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은 아주 갓 만든 신차(신차의 가격은 한국 돈으로 몇천원밖에 하지 않습니다)를 화학처리를 거쳐서 재포장한 경우입니다. 화학적으로 위조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쓰이는 대표적인 화학제로서는 카바이트, 황산가스, 불소, 염소수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화학제를 이용해서 생차의 강한 맛과
향과 색 등을 빼버린 후 오래 묵은 듯하게 만들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썩은 보이차가 있습니다. 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악퇴 도중 썩어버린 차를 그대로 유통시키는 것입니다. 보이차 제조 과정에서 악퇴를 하다가 썩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면 그 차엽은 당연히 폐기처분을 해야하는데 그런 차들이 뒤로 돌려져서 화학처리를 한 후 좋지 않은 맛과 향을 빼고 긴압을 해서 유통되는 경우입니다.

메주를 띄우다가도 잘못 발효를 시켜서 썩어버리는 경우가 있듯이 숙차 보이차도 마찬가지로 발효를 하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썩어버린 차들은 냄새도 고약할 뿐만 아니라 더러 진드기와 같은 벌레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물론 그런 차들이 뒤로 빼돌려져 화학약품처리가 된 후 유통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폐기처분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가짜는 아니지만 보이차의 품질과 관련되는 것으로는 보관상태의 문제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보이차라도 10년, 20년 묵히는 공간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맛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대만등지에서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보관되었다'란 말을 흔히 듣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일반 집등에서 보관된 제품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은 보관을 오랫동안 해야하는 보이차의 특성상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차 고르기 - 손성구

좋은 보이차 옳게 고르기............손성구

현재 우리나라 차시장에도 중국의 보이차가 많이 들어와, 중국차를 파는 차가게 뿐만아니라 사이버 쇼핑몰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보이차를 팔고 있다. 상인들은 모두 보이차가 건강에 매우 좋고, 오래 묵을수록 더 좋다고 소개한다. 사실 그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는 웬만큼 제대로 보이차를 접하고, 마셔보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첫째 보이차를 파는 차상인들조차 진짜 보이차를 제대로 모른다. 둘째 차상인들이 진짜를 알아도, 진짜 보이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60년 이상된 보이차들은 가격이 몹시 비싸며 수량도 극히 적어, 대부분이 홍콩이나 대만의 수장가들이 소장하고 있어 한국에까지 들어올 양이 거의 없다. 10여 년간의 보이차 생활과 보이차에 대한 연구, 대만의 "보이차" 저자 등시해(鄧時海) 선생과의 토론을 통해 얻은 경험을 기술하려고 한다.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 위해서는 먼저 몇가지 사항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매변의 발생 여부이다.

매변이란 보이차에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를 말한다. 매변의 발생 여부는 보이차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가장 먼저 이해되고 중시해야 하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그 본래의 맛과 향기가 그 본래의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가치는 이미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 가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가 무해한지 유해한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한 보이차 연구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체에 무해하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어, 일본에서는 매변이 일어난 누룩곰팡이가 핀 보이차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많은 연구가와 전문가들은 오히려 인체에 유해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산 동의대학 생물학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체에 나쁜 미생물이 있다고도 한다. 대만에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격이 십분의 일인 것을 볼 때도 이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에서 여러 상인들이 한때 오래묵은 보이차를 팔면서 대만에서는 같은 물건이 4-5배 비싼데, 자기들은 4-5분의 1 가격으로 판다고 말하곤 했다. 그 당시 필자와 여러사람들도 함께 의아해한 이유가 그러면 그 보이차들을 대만에 갔다 팔면 더 좋지않나 생각한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치가 제대로 완전한 물건의 10분의 1 밖에 안되기 때문이었다.

둘째, 보이차의 외형적 색깔을 살펴야 한다.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색깔이 검고 짙다. 필자가 등시해 교수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제대로 저장된 보이차들은 마치 낙엽을 곱게 보관한 것처럼 밝은 황색들이었다. 짙거나 검게 변한 차들은 이미 매변이 일어났거나 처음부터 숙창으로 만들어진 보이차로 보면 된다.

셋째, 보이차의 무게이다.

정상적인 보이차들은 손으로 들어보았을 때 마치 솜털같이 가볍다. 필자가 처음 복원창호와 동경호를 손으로 만졌을 때 너무 가벼워 손위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 이유는 90년에서 1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곰삭었기 때문에, 차잎의 형태들은 그대로이지만 차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낙엽들을 수 간만 보관해도 가벼운 것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60년, 70년, 90년, 100여년 동안의 긴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생각해 보면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넷째, 보이차의 맛이다.

50년이상의 보이차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보이차를 마신 분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짚신 썩은 맛이거나 볏집 썩은 맛이거나 몹시 쓰고 찝찔하다 등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이것이 보이차 맛의 특징이라고 소개받았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소개했다. 많은 분들은 아직도 이런 맛이 보이차의 특징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보이차의 맛은 전혀 그렇지 않고, 맑고 깨끗하고 달고 장뇌나무 향이 서려있다. 불쾌한 맛이 나는 보이차들은 차상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미 매변이 일어나 본래의 맛과 향기가 사라졌거나, 보관이 매우 잘못되어 부패되었거나 처음부터 속성발효로 만든 싸구려 차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차를 우려내고 난 뒤의 차잎 즉 茶底(차저)를 살펴야 한다.

정상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은 손으로 잘 찢어지고, 잎 표면도 부드럽다. 또한 차잎 줄기도 부드럽게 끊어지나다. 그러나 속성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이 매우 질기고 잎 표면도 거칠다. 특히 차잎 줄기는 생잎과 같이 매우 질기고 찢기 힘들다.

여섯째, 보이차를 시음할 때 차의 농도에 주의해야 한다.

대만의 "보이차"의 저자 등시해 교수는 보이차를 마실 때 아주 여리게 마셔야 그 차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고, 오히려 너무 진하게 마시면 혀가 마비되어 차의 참 맛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가짜차를 팔 때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여 보이차를 진하게 우려낸다고 한다. 이런 음다법은 차상인의 저의가 짙게 깔려 있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혀를 마비시켜 차를 제대로 감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차 사용량을 많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차가게에서도 보이차를 마실 때 거의가 매우 진하게 우려낸다. 또 검고 진하게 차를 마실 줄 알아야 보이차를 많이 아는 것으로 평가해 주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차가 너무 진하면 위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어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되고, 차 맛도 제대로 즐길수 없으며, 경제적 부담도 크다고 한다.

일곱째, 오래묵은 진짜 보이차의 수량이다.

복원창, 동경호, 경창, 강성, 홍인 등의 오래된 보이차들은 그 수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대만, 홍콩에서도 일부 보이차 수장가들한테만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 그렇게 많은 보이차들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대만의 한 차상인이 "대만에서는 돈은 있으나 보이차가 없어 차를 살 수 없고, 한국에서는 보이차는 많으나 돈이 없어 차를 살수 없다"라는 말은 현재 한국의 보이차 실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등시해 교수가 직접 감정한 동경호가 2통(14편)이 채 안된다고 한다.

여덟째, 정상적으로 제다한 10년 미만의 보이차의 품질도 훌륭하다.

어떤 차상인은 30년 이하의 보이차는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2급의 대엽종잎으로 만든 산차들은 햇차라도 맛과 향이 매우 뛰어나다. 병차의 가격도 250그램 한편에 3만원 이하로 매우 싸다. 우리들은 보이차가 매우 비싼 줄 알지만, 요즈음 나오는 보이차들은 매우 싸다. 이 사이트의 <보이차가격표>란에 현재 대만과 중국에서의 보이차 가격을 게재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보이차를 올바르게 고르기 위해서는, 차상인의 설명이나 논리에 상관하지 말고 위의 몇가지 사항을 참고하여 꼭 시음해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통으로 구입하는 분은 통속의 7편이 색깔이나 상태가 균일한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만에서 등시해 교수에게 감정받으러 온 1통의 동경호에서, 맨 윗장 1편만 진짜이고 나머지 6편은 가짜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이차의 역사

商周時代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雲南(운남)의 복족( 族) 사람들은 이미 보이차 나무를 심었고 보이 차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史料에는 복족인들이 상왕(商王)에게 키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商나라 때 복족인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때 常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 촉(蜀)의 군대를 얻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공납케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巴蜀의 군대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인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운남은 차의 고향이니, 이로써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인들은 이미 차잎을 생산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 12 쪽에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그 지역은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설은, 상주(商周)시기에 운남에서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시기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의 옥쇄를 하사하였다.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 池縣)을 다스렸다. 三國時期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도( )라고 부르고, 선(選)이라고도 부른다.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山陵의 경계에서 자란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채집해 말린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도( )자는 문장 뜻에 비추어 볼 때, 차잎이니, 운남지역에서 한(漢)나라 시대에 茶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남겼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의 시작을 펼쳤다. '茶山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는데, 五山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자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무후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공명(孔明)선생이다.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다, 지금의 운남성 西雙版納(서쌍판납)자치주,  海(맹해)의 南 山(남나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 중에서 "5월에 瀘江(지금의 금사강)을 건넜다"고 기록한 것은 곧 전남( 南)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지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夷族(이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의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전해 심은 것이어서 夷民族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야사로서 전해지고 있지만, 보이차의 正史적 기록이 없는 시기에는 매우 의존 할만하다.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번작(樊綽)이 벼슬을 버리고 운남의 南沼地(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蠻書(만서)>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 지역의 여러 산에서 생산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라 는 기록이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 지역은 지금의 운남성 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를 생산하였을 뿐만아니라, 5백여리 밖에까지 판매 공급되어서,  海(이해) 부근의 몽사(지금의 운남성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음용했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잎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은생성 지역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잎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를 비추어 보면, 은생성 지역의 차는 당연히 운남의 대엽차종 종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엽차종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종이고 보이차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지역에서 나는 차잎은 당연히 보이차의 시조이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가 같아서 당나라 때 은생성 지역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고 본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 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 길"이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육우(陸羽)는 당대의 차에 있어 큰 스승이다. 그의 저서 <다경(茶經)>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차관련 저서로 평가받고, 그런 이유로 [다신(茶神)]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육우와 함께 이름을 날린 차의 대가로 문인인 노동(盧仝)이 있다.

송대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수시로 채취하여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잎은 여전히 확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송시기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잎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 외에 더욱 중요한 점이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차잎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왕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 수 있으며 "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확고한 사실이 됐다.

원대

원(元)나라는 전체 중국차 문화의 전승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원나라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를 남겼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가는데, 그가 마신 차나무 잎은, 바로 운남 대엽차종의 후손일 것이며 다시 말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으며,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런데 원나라에서부터 보이차는 그 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普 府)로 되었다. 이로부터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힌 이 지역 시장에서 매매하는 필수상품이 되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 이 때부터 그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 사조제(謝는肇 )는 그의 <전략( 略)>중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보차"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인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가 쓰고, 그의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에 의해 1664년에 출판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 것을 참고 할 수 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케 하였다. 이에 1391년에 "용단(龍團,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공납하라"는 공차 개혁의 명을 내려, 검소하고 소박한 사회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는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운남에서 흥기하여, 운남과 서역 사이를 대상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 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와서. 차잎으로 교환하여 갔다.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사람과 말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전문 교역로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서쌍판나의 6대 차산 지역의 남쪽 끝인 이무진(易武鎭)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보이진과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이러한 운남의 경내를 거치는 길을"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이무진에서 석고진으로 이르는 돌로 포장한 길은 "석괴고차도(石塊古茶道)"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석고진에서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고차도와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茶道의 길을 따라 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잎의 제일 중요한 중심집산지로 개발되었고, 점점 상인들은 운남 차잎과 보이부가 하나로 인식되게 되어,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 지역내의 교목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 제품은 모두 일률적으로 보이차라고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청대

청대의 보이차는 환골탈태하여 귀중시 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공차가 되어 가장 빛나고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성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옹정(雍正)황제는 1726년에 만주족인 심복대신 악이태(鄂爾泰)를 운남총독으로 임명하고, 3년 뒤 "보이부치(普 府治)"를 설치하여 보이차의 매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 해 가장 여린 잎으로 만든 차를 진상케 하는" 정책을 써서 가장 좋은 보이차를 북경에 공납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어 수차례 황제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다.

매년 보이차의 제작과 운영을 위해, 청나라 조정은 보이부의 영이(寧 )지방에 보이공차 공장을 건립하여, 매년 청조정에 공차를 진상했는데, 그 가치가 당시에 쌀을 십여만 섬을 살수 있는 금액이었다.
공차의 종류는 8가지로 오근단차(五斤團茶), 삼근단차(三斤團茶), 일근단차(一斤團茶), 사량단차(四兩團茶), 일량오전단차(一兩五錢團茶), 병장아차산차(甁裝芽茶散茶), 예차산차, 갑장차고(匣裝茶膏) 등이다.

보이현 서문산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황궁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普 女芽茶), 보이다고(普 茶膏)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서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가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시작되었다가,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보이 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근 200년 동안 깊은 찬사 속에서 마셔졌다. .청대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순하고 진하여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들에게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따라 보이차를 만드는 차장(茶莊, 차상점)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 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元泰豊) 등의 차장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서쌍판납의 6대차산의 최고 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 차산을 드나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 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중국내 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 차산의 차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차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 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보이 명차

보이 명차

복원창호

청나라 때 왕싱에게 바치는 푸얼공차의 차잎은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이 주된 원료였다. 이에 따라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은 청나라 말기 이전의 차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의방차구의 푸얼차 가게들이 무척 흥성하였으나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 고증할 수 있는 차가게의 상호는 오직 송운호와 원창호 두 가게뿐이다.

청나라 중기 이무산의 대엽종 푸얼차 사업이 활기를 띠자 의방차구의 소엽종을 주로 취급해왔던 원창호도 이에 가세해 이무의 상업거리에 분점을 개설하였다. 분점의 이름을 복원창호라 지었으며 이무산의 대엽종 차잎만 취급해 엄선한 차잎으로 만든 푸얼원차를 고급 차인들에게 공급하였고 해외시장으로도 수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접어들어 정세의 불안 및 치안부재, 유행성 질병까지 겹치자 푸얼차를 취급하는 모든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이 때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과 이무의 복원창호 분점도 같은 운명을 맞아 폐업하게 된다.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은 완전히 폐업한 반면 이무차그의 복원창호 분점은 1922년에 다시 개업한 차가게였다.

복원창원차는 동경노호와 쌍벽을 이루는 푸얼차의 극품이다. 차의 묵은 맛을 판단해 보면 동경노호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고, 포장인 죽순 껍질의 재질은 동경노호에 비해 떨어지지만 아주 좋은 재료에 속하며, 묶는 기술도 동경노호의 방법과 동일하다.

내비와 내표의 재질은 모두 오볼라토이기에 대부분 좀벌레가 먹어 완전한 형태는 보기가 어렵다. 또한 내표와 내비의 그림, 글자의 원판은 모두 인장을 새겨서 수공으로 찍어낸 것으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복원창원차는 이무정산 대엽종 차잎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푸얼차이기에 오늘날 중국의 푸얼차계에서는 복원창원차를 가리켜 푸얼차왕이라 극찬한다.
오늘날 의방차구의 원창로 본점에서 생산된 푸얼원차 제품을 볼 수 없으며 이무의 복원창호분점의 푸얼원차만 있는데 이도 또한 극소수의 푸얼차 수장가의 수중에 들어가 푸얼차의 유통 시장에서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동경호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에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립하였다. 동경호는 개점이후 약 200년간 줄곧 용마상표의 내표를사용했는데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1950년 중국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차가게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하자 동경호는 휴업을 선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50년대 폐업 이전의 동경호의 모든 제품은 가장 좋은 이무산의 야생 대엽종차잎, 일쇄, 건창 등 정통 제다법으로 만들어졌기에 오늘날 푸얼차계에서는 최고의 푸얼차로 대접받는다. 동경호의 명성이 커지자 당시 사용했던 용마상표인 내표를 본뜬 위조품이 나돌기 시작했다. 때문에 1920년 8월부터 내표의 모양을 쌍사기도로 변경한다. 따라서 오늘날 1920년 이전 용마상표를 내표로 사용했던 시기의 동경호 푸얼차를 동경노호푸얼이라 부르며, 폐업할 때까지 사용했던 쌍사기도푸얼차는 통상 동경푸얼차라고 부른다.
용마상표로 유명한 동경노호 푸얼원차는 따스한 3월 봄날의 이무산의 2,4,5등급의 어리고 부드러운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는 비교적 넓고 직경이 약20cm, 무게는 340g이며 오랜기간의 저장을 걸치면 차의 겉면은 집은 밤색을 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홍태창호

오늘날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는 홍태창호는 중국 운남성 의방 홍창호가 1930년대 해외 판매망의 거점하나로 태국 방콕에 설치한 지점의 제품이다.

초기 제품은 의방의 소엽종차잎 제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음 모두다 대엽종 푸얼차이다. 초기제품의 차잎은 단단하면서 가늘고 길었으며 차의 새순에 달린 가지의 색은 금황색을 띄우며 차 덩어리의 표면은 반들반들하였다. 우려낸 탕색은 밤색이고 수성은 담백하며 운남성 소엽종 차잎의 야생 청향이 짙게 뽐낸다.

근래 홍콩의 홍태창회사가 운남성에서 푸얼차잎을 수입하여 압제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품은 묵은 푸얼차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므로 선택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송빙호

송빙호 차상점은 청나라 광서 초기에 이무진에서 창립하였으며 많은 양의 푸얼차를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푸얼차시장의 송빙호 푸얼차 제품은 범람할 정도로 많으나 대체로 5%의 진품롸 95%의 가품들이 있다. 그러나 5%의 진품 송빙호푸얼차제품도 질이 무척 낮은 것이기에 건리정송빙호 또는 옛 송빙호시대에 만들어진 푸얼차를 발견하면 푸얼차의 진품 혹은 극품이라 대접을 받는다.

현재 푸얼차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가짜 송빙호 제품 종류는 대체로 5-6가지 된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푸얼차제품으로 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유통하는 것인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 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의 격동기에 생산된 푸얼차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표도 없이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에 운반하여 팔았다. 오늘날 소위 가짜 푸얼차라는 것이 이 시대에 생산된 이름 없는 푸얼차에 유명상표를 붙여 유통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교적 좋은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어 유명해진 맹해차공장에서도 이러한 상표 없는 제품들을 많이 출하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제품을 포장지 없는 녹인이라 부른다.

2)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재배형 관목푸얼차잎의 등장등의 원인에 의해 70년대 이후부터 많은 상인들이 동남아지역의 대엽종 차잎인 변경푸얼 특히 월남의 대엽차잎과 중국 광동성 지역에서 생산된 푸얼산차를 만들었다. 이 때 일부 악덕상인들이 인쇄한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가짜를 진짜처럼 유통하였고, 후일 묵은 대엽종 푸얼차가 선풍적으로 유행하게되자 이러한 제품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3) 홍콩에 설립되었던 송빙호의 지점인 복화호에서도 가짜를 만들었다. 초기에 주로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었으나 후일 중국 공산정권의 정세로 인해 부득이 월남지방의 대엽종 차잎을 구입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남아지역의 변경푸얼로 만들어진 푸얼차가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자 복화호지점은 중국 본점의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속여 팔았다.

경창호

중화민국 초기 경창호 차가게는 운남성 강성지역세서 규모가 제일 크고 이름을 날닌 푸얼차가게 중의 하나였다. 경창원차는 푸얼정산 즉 만쇄차산의 제일 좋은 대엽종 차잎을 채집하여 만든다. 만쇄산은 라오스 접경지역의 위치에 있으며 옛 이무산의 북쪽 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쇄산의 차잎 품질은 이무차산의 다음 가는 으뜸제품이다.

경창원차의 대엽종 차잎 크기는 넓고 크다. 가지 또한 굵고 견실하며 특히 차잎은 마치 차기름에 담가두었던 것처럼 기름진 빛이 가득하고 황금빛의 차순이 발하고 있다. 압축 제조 기술이 정교하고 규칙적이며 가장자리의 두께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덩어리의 표면은 고르다. 덩어리의 직경이 20.5cm이고, 무게는 약330g이다.

가벼운 녹나무 향기에 차맛이 극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워 입안에 들어가면 즉시에 녹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이 푸얼원차 제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다. 각 덩어리에는 내비 한 장씩 있는데 타원형의 도안이며, 동경노호의 내비 디자인과 매우 유사하다.

예로부터 운남성 개인 차가게에서 만든 푸얼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호의 푸얼원차의 제조 공정과 기술이 가장 정교하고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강성원차

1950년대 중국 공산정권 하에 차잎 수매지역에 따라 차잎의 가격을 매겼다. 운남성에서도 이를 따라 차잎의 품질을 통제, 기술 수준의 평등화 등을 통해 공정한 교역이 될 수 있도록 일률적인 가격을 정했다. 이때 강성현, 란창현은 모두 시쐉반나의 푸얼차 수매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강성현에서 자란 차잎은 시쐉반나(西雙版納)의 푸얼 차잎과 대등할 뿐만 아니라 품질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강성원차는 보경원차와 같이 오직 내표만 있고 내비는 없는 푸얼원차이다.

강성원차의 덩어리는 단단하며 직경은 19.5㎝이고 무게는 약 320g이다. 특수한 압축 기술로 인해 덩어리 평면이 고르지 않았고 가장자리의 두께는 녹색을 띄며 고르지도 않았다. 가지 줄기는 납작하고 길었으며 밤색나는 황색 빛깔에 차잎은 반지르하며 윤기가 난다. 전체적으로 경창원차와 매우 비슷하며 대뎝종 푸얼차잎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풍기는 녹나무 향은 비교적 약하나 묵은 청향이 짙어 상쾌한 맛이 난다. 차맛이 비교적 가벼우나 부드러우면서 순하기에 마시고 나면 진액이 생겨 좋은 푸얼차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푸얼차계의 일부 인사들이 강성원차를 가리켜 경창원차의 자매품이라고 말한다. 이는 강성원차도 경창원차와 같이 1930년대에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동흥호

동흥호 차가게의 옛 이름은 동순상호 또는 중신행이라 한다. 1733년 이무진에서 창립되었으며 1921년 전후 동경호와 같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이름을 떨쳤던 차가게였다. 그때 동흥호에서 생산된 푸얼차의 수량은 해마다 약 500담으로 이는 대형의 차가게에 속한다.

오늘날 동흥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권 하인 1921년부터 1934년 사이에 만든 것은 총상 동흥초기원차라 부르며 1934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정권 탄생이전까지 만든 것은 동흥후기원차라고 부른다. 양자의 차잎은 모두 의방차산의 만송다원에서 채취한 소엽종 차잎이기에 품질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동창호

동창호는 1869년 청타라 동치7년에 창립되었으나 청나라 말기 정국 불안으로 인하여 폐업했다.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바뀌고 푸얼차 시장이 점차 안정을 찾자 1921년 전후에 많은 차상점들이 이무차구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이때 새로 창업한 차가게들도 많았다. 그 중 주관보라는 차상인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동창호 차가게를 해로이 설립하여 이무정산의 푸얼차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1931년경 황문흥이라는 상인이 동창호를 인수하고 가게를 운영했다. 주인이 바뀌었어도 계속 동창호라는 상호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다만 원차의 내비의 낙관에 '주인 황문홍이 삼가 올림'이라고 고쳐 썼다.

오늘날 내비의 문구, 디자인의 색상에 따라 동창호 푸얼원차는 세 가지로 나눈다. 동창원차, 동창황기남원차, 동창황기홍원차 등이 그것이다. 1949년 경 황금당씨가 동창호를 인수할 때 상호를 동창황기라고 고쳤다. 이때 원차 내비의 디자인 도안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색의 내비, 하나는 붉은 색의 내비로 만들었다.

남색 내비의 낙관에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찍혀있는 것을 동창황기남원차라고 하고, 묽은 색 낙관에 같은 내용의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동창황기홍원차라고 말한다. 양자는 모두 약 50년 정도 묵인 푸얼원차이다.

전기의 동창원차의 덩어리는 두텁고 짙은 밤색을 띈다. 가지 줄기가 납작하면서 길고 흰 솜털인 백호는 거칠면서 두텁다. 줄기와 차잎이 정렬하게 혼합되어 있어 좋은 푸얼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동창원차는 다른 동창호 원차에 비해 겉 표면의 윤기가 좋다.

후기의 동창황기남원차의 외관은 전기의 동창원차와 아주 비슷하다. 빛깔과 윤기도 대체로 같으며 다만 가지 줄기가 좀 가늘고 차잎이 약간 마르게 보이므로 동창원차보다는 질이 떨어진 제품이다.

양빙호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양빙호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빙호를 소개하는 이유는 양빙원차는 의방차구의 소엽종으로 만든 푸얼원차이기 때문이다.

푸얼차를 논한다면 운남성 [6대차산] 즉 [이무차구-易武茶區]를 빼놓고는 애기 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6대차산]이란 西雙版納 내의 攸樂, 革登, 莽芝, 蠻專, 漫撤, 依邦 등의 차산을 말한다.

그러나 원, 명,나라부터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운남성의 6대차산의 이름은 오늘날과는 다르다.
이 시대에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이무산, 우곤당산 절반과 만랍산 절반을 합쳐 5대차산이라 했고, 후일 유락산 일명 공명산과 다시 합쳐 6대차산이라 불렀다. 이 중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우곤당산 절반의 차산 등 전지역을 가리켜 의방차산라고 한다.

의방차산은 운남성 내에서 제일 먼저 소엽종 차잎을 재배한 차산이다. 운남성의 소여종 차잎은 명나라 말기 사천성 다농들이 이곳 의방차산으로 이주해 올 때 소엽종 차씨를 가져와 재배했던 것이다.
의방의 소엽종 차맛은 대엽종 푸얼의 진하고 두터운 맛의 특성을 가지면서 소엽종의 청향을 겸해 뒷맛이 달고 매끄럽다. 또한 여린 것이 늙은 것 보다 향기롭고 새것이 묵은 것 보다 진하며 싱싱한 것을 물에 울구어 마시기가 가장 적합하다.

양빙원차의 덩어리는 여타 푸얼원차 보다 비교적 작은 편이다. 직경이 19㎝이며, 무게는 약 280g이다. 매 덩어리마다 5×6.8㎝의 가로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묽은 글씨로 되어있다. 덩어리 표면의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었으며 윤기가 나는 누른 싹도 보인다. 차탕은 청향이 나고 차맛은 진하지 않으나 약간 신맛이 섞여 있어 의방 소엽종 푸얼차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푸얼원차이다.

홍인원차

홍인원차를 논하고자 하면 범화균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40년에 운남성 불해에 임시로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들들로부터 품질 좋은 야생차잎을 사들여 처음으로 푸얼원차를 제조하였다. 그중 시험적으로 제조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홍인푸얼원차와 녹인푸얼원차 등 푸얼차제품이다.

이 때 원차의 겉면 포장지의 정 중앙에는 8중차(8中茶)표시 즉 가우데의 차자는 8개의 중자로 둘러 쌓여 이었으며, 포장지의 가장자리 위쪽은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 아래쪽은 중차패원자라는 글자를 원형으로 배열하여 표기했다. 차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지방의 차잎으로 만들어진 원차의 차자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이라 했고,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차잎으로 제다한 원차의 차자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녹인이라 불렀다.

홍인푸얼원차는 40년대 국민당정부에서 생산된 초기홍인과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초기홍인은 이무차산의 최고품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이 품질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진짜 홍인푸얼원차의 차잎은 크고 알차며 줄기 또한 포만하고 차잎 표면이 반들반들한 윤기가 나며 색깔은 붉은 밤색이다. 우러난 탕색은 붉고 선명하며 맛은 매우 진하고 난초향기와 야생 녹나무 향기가 배어있다. 차찌꺼기는 연하고 싱싱하며 마치 두꺼비 껍질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구식의 나무모형으로 압축하여 제조했기에 중아부분이 부풀어 배꼽이 있는 것 같으며 8중차의 내비는 완전히 차 덩어리의 속에 묻혀 출하되어 있다.

한편 수량이 많지 않은 홍인철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소홍인이라 한다. 50년대초 공산정권의 운남성 하관차공장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개향식 금속 압축모형으로 만든 푸얼원차이다. 차잎 원료는 멀리 맹해 차공장에서 고급 차잎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생산되 푸얼차의 이름은 원차철병이다. 원차철병의 품질은 초깅홍인과 후기홍인 사이에 있고, 차의 향기는 초기홍인의 난초 향보다는 후기홍인의 야생 녹나무 향을 더 빼었다. 이에 따라 원차철병은 맑은 녹나무 향기가 물신 풍긴 대표적인 푸얼차 제품으로 자리잡는다.

녹인원차

녹인원차도 홍인원차와 마찬가지로 차 겉면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의 차자가 푸른 색이이기에 녹인이라 부른 것이다. 역사는 홍인과 같기에 40년대에 생산한 초기 제품과 50년대 이후에 생산한 후기 제품 등 두 가지로 나눈다.

초기녹인원차는 맹해 일대에서 나는 차잎으로 만들었다. 사모에서 파달흑산일대까지에서 생산된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차잎 원료의 질은 매우 좋다. 이무와 맹해에서 수거된 차잎 중에 으듬의 차잎은 갑급이라 정하고, 그 다음은 을급으로 나누어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녹인갑을워차 또는 남인푸얼원차라 불려지는 초기녹인은 녹나무 향기, 차의 묵은 맛은 상당히 좋으면서도 불구하고 시중의 가격은 홍인의 절반값에 유통되었다.

후기녹인원차는 50년대로부터 6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맹해차공장에서 만든 모든 푸얼차는 녹인상표의 표지를 달았기에 상당한 수량의 푸얼차가 생산되었다. 후기녹인은 그 차잎과 품질면에서 매년 수매한 차잎의 품질과 각 지방의 차잎의 질이 서로 다르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녹인원차의 명칭은 운남칠자병차라 바뀌었고 이에 따라 녹인원차의 상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이 1973년에 푸얼차의 쾌속진화 퇴적발효 제조공정 기술인 습창법의 연구가 성공되자, 칠자병차는 여러 등급의 관목형 차잎을 섞어 습창법으로 숙병을 만들었다.

포장지 없는 녹인은 50년대와 60년대 사이 20년간은 중국공산정권 사회에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특히 50년대 초반 때에 많은 무명 푸얼차 제품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생산방식에 따라 이 시절 출하된 푸얼차는 모두 나라의 재산이기에 상표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포장지를 절약하는 취지아래 포장하지 않은 채로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로 운반하여 팔았다. 맹해 차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자녹인원차는 포장지 없는 녹인의 후속제품으로 맹해차공장에서 50년대 초반에 출하되었다. 사용했던 차잎은 대체로 좋은 것이었으며 제조공정도 청병 방식에 건창법으로 만들어졌다.
소자녹인원차는 오늘날 자료도 기록도 없는 일정량이 유통되고 있다. 제품의 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며 야생 교목에서 자란 차잎으로 만든 청병에 건창법으로 저장되었기에 소자녹인원차는 자연적인 차향이 많이 나는 신선한 좋은 푸얼차라 할 수 있다.

황인원차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을 생산했던 시기에 포장지의 중차패 차자가 누른 색으로표시된 푸얼차 제품이 있었는데 후일 이것을 황인원차라고 부른다. 이때 생산된 황인원차 제품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덩어리가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대황인이라 하고 작은 것은 소황인이라 한다.
황인원차의 특징은 기존 다른 원차는 한 가지 차잎으로 만드는데 반해 황인원차는 여러 등급의 차잎으로 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차를 개조차라고 한다. 크고 둥근 것은 긴단차라 하고, 낙고 둥근 것은 여아차라 한다. 장사꾼들은 덩어리차의 겉표면을 등급이 좋은 부드러운 차잎으로 사용하고 속은 쇠고 거친 차잎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개조차라 한다.

황인원차의 제조 배합의 비율로 보면 늙은 차잎에 일정한 양의 어린 싹을 섞는 것이 특징이다. 황인원차의 표면에 유난히 많은 어린 차일 싹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런 싹두들이 진화를 거쳐 대부분 금황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황인원차의 덩어리 표면의 특징은 다른 원차보다 누른 색을 더욱 띄는 것이다.

황인원차는 비록 구식의 모형 압축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덩어리는 의외로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또한 제조 공정 중에서 어느 정도의 발효를 거쳤기에 푸얼차의 원래 향기가 소실되어 차성은 푸얼숙병의 특색이 있다. 희미하게 녹나무 향기가 남아있으며 수성이 부드럽고 달며 뒷맛 또한 달고 부드럽다.

찻잎의 주요 성분

찻잎의 주요성분 [펌]

1) 폴리페놀
- 일명 탄닌이라고도 합니다. 찻잎 중에서 카페인과 함께 전체 성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차의 맛과 색, 향기 등에 큰 영향을 주는 물질입니다. 고급 차일수록 그 함량이 많으며, 산화하기 쉬워 재탕을 할 수록 쓴 맛이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폴리페놀 성분은 광합성에 의해 형성되므로 일조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함유량이 달라지고 봄철보다 일조량이 많은 여름이나 가을철에 폴리페놀 함량이 높습니다. 찻잎의 폴리페놀은 수렴 작용에 의해 위 점막을 보호하고 위의 운동을 왕성하게 하며 살균 작용과 유독 물질에 대한 해독 작용을 나타냅니다.

2) 카페인
- 찻잎에도 다량의 카페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카페인은 커피의 카페인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커피의 가페인은 혈청의 지질 농도를 증가시키고 동맥경화의 발병률을 높이는 데 비해 차의 카페인은 혈청 중의 지질 농도를 낮추거나 동맥경화의 발병률을 낮추는 일종의 혈관확장제 역할을 하며 근육의 활력도 높여줍니다. 이것은 찻잎 중의 카페인이 폴리페놀 성분과 쉽게 결합해 크림을 형성하므로 낮은 온도에서 불용성으로 유지되고 냉수나 산성에서 녹지 않으므로 체내에서 동화 속도가 낮아지게 되어 커피의 카페인과 같은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덖음차가 증제차보다 카페인의 함량이 많고, 일찍 딴 차와 해가림 재배한 고급차에 카페인 함량이 많습니다. 차의 카페인은 각성 작용에 의해 잠을 쫓아주고 정신 활동을 높임으로써 기억력, 판단력, 지구력을 증강시키며 두통을 억제하고 심장의 운동을 왕성하게 하여 이뇨 작용을 높이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3) 아미노산과 질소 화합물
- 찻잎 중의 질소 화합물로는 아미노산 이외에도 아마이드, 단백질, 핵산 등이 있습니다. 단백질은 물에 녹지 않으므로 차액 중에 거의 없으나, 아미노산과 아마이드 성분은 물에 용출되어 차의 맛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찻잎 중의 아미노산은 25종으로 차의 독특한 감칠 맛에 영향을 주는 데아닌이 60%를 차지합니다. 데아닌 성분은 차나무가 햇빛을 많이 받으면 카테친류로 변하기 때문에 데아닌의 함량을 높이기 위해 잎이 나올 무렵엔 여러가지 방법으로 햇빛을 차단합니다. 이렇게 하면 잎 중 아미노산은 증가되고 폴리페놀이 감소된 맛이 뛰어난 고급 차가 만들어 집니다. 옥로차가 그러한 예입니다.

4) 비타민류
- 차에는 비타민 A, B1, B2, 니코틴산, 판토텐산, 염산, 비오틴, 비타민 C, 비타민 P 등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함량이 가장 많은 것은 비타민 C인데 90%가 환원형으로 녹차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또 차 속에 들어 있는 비타민 P의 경우 혈관벽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고혈압 약제가 되는 중요한 성분입니다. 봄차에는 적고 가을철의 굳은 잎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5) 식물색소
- 식물성 색소는 차 제품의 외관과 색 등 품질 형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맛과 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식물 색소의 주요 성분은 엽록소, 카로티노이드, 플라보놀 화합물, 안토시안 등입니다.

6) 향기성분
- 찻잎 중의 향기 성분은 생잎 선물량의 0.02%로 매우 적은 양이지만 차의 가격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품질상 매우 중요한 성분으로 꼽힙니다. 녹차의 향기 성분은 청엽 알코올, 벤질 알코올, 헥사놀, 리나롤, 리나롤옥사이드류, 메칠살리실레이드, 제라니올, 페닐에칠알코올 등 약 45종이며, 알코올류가 전체의 80% 정도를 차지합니다. 녹차와 홍차의 향기 성분이 다른 것은 제조 중 녹차는 찌거기나 볶는 과정에서 풋내 성분이 휘발되며 홍차는 발효 과정에서 홍차 특유의 성분이 새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7) 유기산
- 사과 산(malic acid), 프로피온 산(propionic acid), 호박 산(syccinic acid), P-쿠말 산(P-coumaric acid), 콜로로젠 산(chlorogenic acid) 등이 있습니다.

8) 효소
- 산화 작용 관여 효소로는 펠옥시다아제, 폴리페놀 옥시다아제, 카탈라아제 등이고 분해 작용 관여 효소는 펙타제 등입니다. 폴리페놀 옥시다아제는 홍차 발효에 관여하는 효소로 카테친 성분을 홍차 특유의 색소 성분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9) 무기염류
- 찻잎의 5.6%가 무기 성분입니다. 무기염류 중 50%는 칼륨이며, 인산 5% 이외에 칼슘, 마그네슘, 소량의 철과 나트륨, 망간, 구리 등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찻잎 중에는 40~100ppm의 불소가 참유되어 있으며 이 중 75%가 가용성으로 충치예방 기능을 합니다 찻잎 성분의 무기 성분은 어린 잎에 많은 인산이나 칼륨이 성장함에 따라 감소되고, 칼슘, 철, 망간, 알루미늄 등이 증가 합니다.

차의 기원 - 달마설

** 달마에 의한 차의 기원 **

달마가 6세기 초 서역(西域)에서 당나라로 건너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참선 중 자꾸 졸음이 오자 '눈시울이 있어 잠을 불러들인다'며 양 눈의 눈시울을 뚝뚝 떼어서 뒤뜰에 버렸는데, 이튿날 그 자리에 한 나무가 솟아 잎을 씹어보니 금세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차를 수도용 음료로 삼은 것은 달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차의 세가지 기원설의 공통점은 모두 차의 뛰어난 효능을 이야기 했다는데 있다. 관련 인물이 하나같이 생몰(生沒)연대가 확인되지 않은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하는 차의 어떤 효능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과학화된 현대 학문에 의해 밝혀진 성분과 효능은 오히려 전설이 전하는 내용보다 그 신비성이 풍부합니다. 신농과 편작의 약초설위에 질서의 근거이자 새 불교의 이상인 달마설이 첨가되면서 차는 기원에서부터 인류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반려(伴侶)의 자리를 훌륭히 다지게 된 것입니다.

- 태평양 설록차에서 -

초의, 추사, 그리고 다산 - 여연

이맘때면 생각나는 차가 있다. 바로 ‘눈물차’다.‘눈물차’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1996년의 일이다. 별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 둥둥 떠내려오고 달빛은 풀벌레들의 합창에 일그러지던 날이었다.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했듯이 깊은 밤 대자연의 품속에 빨려드는 풍광을 벗삼아 한잔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스님 계십니까” 밤중에 절을 찾는 나그네는 드물다. 아주 친한 도반이나 절 식구만이 늦은 밤 사찰을 찾을 수 있는 법인데 연락도 없이 찾아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해남의 신문사, 농민회 등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활동가들이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10여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였다.

●새로운 茶문화 생산공동체 구성

▲ 초의선사가 그린‘다산초당도’

자우홍련사 툇마루는 때아닌 손님들로 꽉찼다. 한잔의 차를 돌리고 대뜸 찾아온 연유부터 물었다.“스님 저희들이 차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뜻은 간단했다. 향후 환경과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농촌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차문화 생산공동체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당돌한 제안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연결된 차문화공동체 구성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제안에 망설여졌다. 생각해보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후로 대여섯차례 방문하며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결국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작명을 했다. 남쪽에서 늦게 차를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남천다회’라고 명명했다. 어떤 농사든 어떤 계획이든 서둘러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시작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달에 두 번씩 공부를 하기로 했다.‘동다송´‘다신전´, 그리고 행다와 차에 대한 것들도 공부를 했다. 젊은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다.1997년부터 놀고 있던 땅 8000평에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우리가 택한 농법은 철저하게 친환경농법이었다. 화학비료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만 차밭을 조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10년까지는 수확을 바라지 않을 작정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부엽토만 퇴비로 사용했다. 조금 느리지만 인간과 호흡하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을 그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낮에는 차밭을 가꾸고 밤에는 차 공부를 늦게까지 하느라 모두들 열심이었다. 차밭은 4000평,5000평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차 생산지와 다창들 그리고 국내외 유명 다원들을 둘러본 그들의 안목은 점차 넓어지고 깊어졌다.7년째 되던 해인 2002년 4만여평의 차밭에서 생엽 200㎏을 채취했다. 그리고 제다한 가공량은 40㎏.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양이었다. 차브랜드는 ‘손덖음 첫물차’로 했다. 기계적인 영농이 아닌 손으로 덖는 첫물차만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차를 제다해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에게 제사를 지낸 후 모두 모여 차를 마시며 기뻐했다.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사연은 3000평의 차밭을 가꾼 남천다회 부부 이야기다. 차농사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젊은 부부는 고작 4통의 차를 손수 만들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차들을 이불속에 넣고 눈물을 훔치며 밤을 꼬박 샜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나는 눈물차 이야기인 것이다. 이같은 사연이 담긴 첫물차 이름을 남천다회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눈물차’로 명명한 것이다. 그날도 바로 오늘같은 밤이었다. 그때의 기쁨은 차인으로서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아 있다. 이렇듯 ‘인연’은 모든 것을 바꾼다.18세기 최고의 개혁적인 지식인들이었던 초의스님,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당대 조선사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시대까지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산에 유서와 시학 배워

▲ 추사 김정희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서간문.초의 스님은 추사가 보내온 서간문을 묶어 ‘영해타운’이란 책을 펴냈다.

초의스님은 24세 때인 1809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을 아암 혜장스님을 통해 먼저 만났다. 아암 혜장과 정약용은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년 동안 교류했다. 정약용이 아암 혜장에 보낸, 차를 청하는 편지인 ‘걸명소(乞茗疏)’는 지금까지도 차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걸명소´에는 “을축년(1805년)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약으로도 마십니다. 글 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 양 노동의 칠완다를 들이킨다오” ‘소’의 형식을 빌린 다산의 ‘걸명소´는 노동의 시와 육우의 다경 등에서 보여지듯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다도에도 깊은 경지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암 혜장이 세상을 떠난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 초의스님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초의스님은 1813년 다산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때 마침 내린 비로 인해 장삼자락이 젖어 다산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에게 가지 못한 초의는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슬프도다. 이 적은 몸 하나 나에게 선인의 경거술이라도 지었더라면 빗속으로 산넘어 날아갔을 텐데.” 초의스님이 정약용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탁옹(정약용의 별호)선생에게 드림’이란 시다.“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게 없습니다.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의 책상앞에서 말씀드리리라. 하늘이 맹자 어머니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 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라며 감사하고 있다. 훗날 초의가 조선의 신진사대부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정약용에게 받은 것이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많은 교류를 했다.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정약용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초의스님은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말미에 시를 지어 붙였다.1823년 대둔사지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초의스님은 수룡스님과 함께 편집을 담당했고, 호의와 기어스님이 교정을 보았고, 완호와 아암스님이 감정했으며 정약용이 필사를 했다. 정약용이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는 지속되었다. 초의스님은 한양을 방문할 때면 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수종사 인근 마현마을에는 그의 평생 스승 정약용과 정학연이 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관계 떠나 수행자로

다산과 그의 아들은 수종사의 샘물로 늘 차를 달여마셨다. 한양에 온 초의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평생 초의스님의 스승 노릇을 하며 그의 안목을 더욱 깊고 넓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차인으로 차를 직접 제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유·불·선에 대한 폭넓은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차에 대한 제배 및 제다 그리고 행다 등 다양한 논의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스님에 대해 다산은 스승과 제자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초의스님이 평생의 도반(道伴)인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0세인 1815년이다. 초의스님은 그때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2년 동안 머물렀다. 정약용의 주선으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측되는 초의스님은 서울 두릉(杜陵)에 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자하 신위, 해거 홍현주 등과 교류했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와도 사귀었다.1786년 같은해에 태어난 초의와 추사는 한눈에 서로 뜻이 통했다.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고 청의 금석학 시문 전각등을 깊이 연구해온 젊고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추사는 청의 상류사회에서 중국의 고급 차문화를 배워 차에 대해서도 해박했던 것이다. 추사가 가끔씩 초의스님에게 자신이 구한 중국의 고급차를 보낼때 초의스님이 중국차에 대해서 어떤 것은 참으로 진미가 있고 어떤 것은 가짜 느낌이 난다고 했던 것은 그같은 교류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차에 대해 ‘광적’이었을 정도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승설(勝雪), 고다노인(苦茶老人),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 등 차에 관한 수많은 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초의스님에게 차를 선물받고 써준 저 유명한 명선(茗禪)을 비롯, 죽로지실(竹爐之室),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 다산초당(茶山艸堂) 등 차에 관한 수많은 글도 남기고 있다.

일지암을 맨처음 방문한 사람은 추사도 그의 동생들도 아닌 아버지 김노경이었다. 완도 고금도에서 4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 김노경은 그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을 알고 싶어 일지암을 찾은 것이다.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노경은 시·서·화등 다방면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초의스님에게 첫눈에 반했다. 초의스님은 김노경에게 일지암의 유천에 대해 시로 답한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시방에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와 물을 떠가라. 갈때는 달빛 하나씩을 건져가라.”

초의스님의 시에 김노경은 유천의 물맛이 소락의 물맛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한다.“1840년 9월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며 초의스님을 찾아 일지암을 방문한다. 오롯한 가을의 풍광에 휩싸인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을 만나 추사는 애틋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동지부사의 고위직에서 하룻밤 사이에 유배를 떠나는 추사에 대해 초의스님의 위로는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초의스님은 자신의 제자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허유를 통해 제주도로 차와 서신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의스님의 차와 서신을 받아본 추사는 그 고마움에 ‘일로향실’이란 글을 써서 허유편에 보냈다.‘일로향실’은 지금도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초의스님은 1843년 봄 제주도로 건너간다.1년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초의와 추사는 차에 대한 즐거움과 학문적 교류의 폭을 넓혀간다. 추사는 이때 초의스님을 통해 선불교에 대한 혜안을 넓힌다. 초의가 다녀간 다음 해에 추사는 세속의 각박한 인심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속에서도 그를 따르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세상에 선보인다. 소나무와 잦나무 지조는 눈이 내린 후에야 그 절개를 알수 있다는 화제(畵題)를 지닌 ‘세한도’는 세속을 완벽하게 품어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질곡에 대해 울분을 터트려야할 추사로부터 이같은 작품이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것은 초의스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세한도 등 명작들 초의 영향 커

▲ 경기도 남양주시 수종사에서 운영하는 무료찻집.수종사는 초의 스님과 다산 정약용이 교류했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초의스님은 제주도에서 차의 재배를 시도한다.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를 위해 차의 재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인연이어서일까. 지금 제주도에는 국내 굴지의 회사가 운영하는 광대한 차밭이 존재한다. 초의스님은 1851년 추사가 보내온 서간문을 모은 ‘영해타운´(瀛海朶雲)을 책으로 묶어낸다.‘영해타운´은 1840년부터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추사가 보낸 서신을 차곡 차곡 모았다가 책자로 편서한 것이다. 초의스님이 추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절절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사는 북청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 머물며 초의스님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소동파의 생일날 과천 사람이’란 편지는 그러한 추사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큰눈이 내리고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 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함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요즘 송나라때 만든 소룡단(小龍團)이라는 차 한 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 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초의스님은 추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차를 보내달라는 추사의 청도 제때 지키지 않았다.

추사는 제때 차를 부쳐주지 않는 초의스님에게 익살섞인 ‘최후의 통첩‘도 보낸다.“지금 지체없이 보내지 않으면 덕산의 방과 임제의 할로 경책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초의스님이 차를 보내오면 “과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시음하니 과연 천하의 제일가는 차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스님과 그의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던 추사가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초의스님은 깊이 슬퍼했다. 슬픔에 못이긴 초의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3년후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쓴다.“오호라 그대와 나의 42년 동안의 아름답던 우정이여. 그 우정일랑 다음에 저 세상에서도 오래 오래 이어나가십시다. 나는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마치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그대와 만났을 때는 진정 허물이 없었습니다. 그대와 나는 손수 뇌협과 설유를 달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다 슬픈 소문이 귀에 닿으면 적삼 옷이 함께 젖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그대를 먼저 떠나보내는 나의 애끓는 심사여. 황국이 다시들고 흰눈이 내리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늦게 그대의 영전에 당도했을꼬. 원망일세 원망이로세. 하늘과 땅 사람이 모두 알지 못해도 오직 그대는 나의 심사를 알것입니다.”라고 애절하고 통절한 마음을 적고 있다.

추사를 보낸 초의스님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떠나버린 그를 잊지 못했다. 초의, 추사, 다산은 이렇게 거대한 변화의 담론이 진행됐던 18세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이 엮어낸 인연의 바다는 새로운 세기에 목말랐던 많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눈물차를 만들어낸 남천다회도 마찬가지다.

20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일지암과 초의스님의 선차(禪茶)의 인연이 오늘 이시대에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가 결합된 진정한 차의 세계를 열려는 움직임을 싹틔우고 있는 것이다.‘눈물차’를 만들며 차문화생산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남천다회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차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에 따른 보이차의 맛과 향

지역에 따라 다른 운남 보이차의 향과 맛
(20개 지역의 찻잎 비교)

출전: 운남 신경 보이차망
번역: 천진 진향 보이차

운남은 지형 기후 환경이 특수하다. 고 위도, 고 해발, 저 위도, 저 해발이 일치하면서 지리적 위치가 특수하고 지형이 복잡하다. 그 특색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지역적 차이가 분명하고 수직 변화가 두드러진다.

2) 연 강수량 차이가 작고 일교차가 크다.

3) 강우량이 충분하고 우기 건기의 구분이 명확하다. 남쪽은 강우량이 많고 북쪽은 강우량이 적은 편이어서 불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조건 하에 차 나무의 종류와 성장 생태의 차이로 각 차산 차청과 차의 품질은 현저히 다른 특성을 갖는다. 만일 같은 차나무, 동등한 성장 생태, 같은 제조과정이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운남 차 생산지역에서는 “남쪽은 쓰고 북쪽은 떫고(北苦南澁)”, “동쪽은 부드럽고 서쪽은 거칠은(東柔西剛)” 특성이 출현한다.

본문은 차 산지에 따른 차의 특성은 대부분 수공으로 제작한 재배형(栽培型) 야생차와 야생 방임형 차를 위주로 소개한다. 정상적인 제조과정, 춘차, 일아 일엽(一心一葉)과 일심 이엽(一心二曄) 이라는 상황에서 평가 감정한 특성이다. 필자 개인의 입맛에 의하여 감상을 서술하였으므로 절대 표준은 아니니 독자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1.만살(曼撒)

위치: 운남성 서쌍판납주 맹랍현 중북부. 고 육대차산 지역

소개: 맹랍현 이무향 동북쪽에 위치하며 이무진 내에서 대략 20km 거리이며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형이 복잡하고 낙차가 커서 최고 해발이 1950m이고 최저 해발이 750m이다.

청조 건륭(乾隆) 연간에 만살은 최고 전성를 구가하였고 연간 만담(擔: 500g이 1담)이상을 생산했다고 역사에 전한다. 당시 생산된 차는 대부분 만살 고시가 에 모아 교역하였다; 만살은 전성기에 주민이 300여 호 였다. 동치(同治) 13년 만살 고 거리는 제 일차 화재로 거의 사라져 버렸다; 광서(光緖) 13년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번영했던 만살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3차 화재와 전염병은 이 소진을 폐허된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 때 만살에서 20리 떨어진 이무가 즉각 만살의 위치를 대체하였다. 이 것이 광서 황제 이후 보이부지(普이府誌)에 이무가 만살을 대체하여 육대차산이 된 이유이다. 고대 행정 구역에서 만살은 이무 토사(土司: 원 명 청 시대의 소수민족의 세습 족장) 관할이었으며 거리가 가까워 둘간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적지 않은 수공 공장들은 두 지역의 차청을 모두 이무 차청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엽종 재배형 야생차의 특색: 향기롭고 달달한 차중에서 가장 특색을 갖춘 차로 향이 흩날리며 부드럽다(香揚水柔); 혓바닥과 윗턱 중후 부위에 향기가 가득 차며 우수한 차는 단 여운(甘韻)이 양 뺨에 까지 미친다. 근래 과도한 채집과 계절적인 요소 때문에 탕이 비교적 짙지 않다

2,이무(易武)

위치: 서쌍판납주 맹랍현

소개: 원래 고대 만살 차구에 속햇다. 현재 이무 차구 재배형 야생차 연 생산량은 대략 60톤이며 계단식 재배차는 300톤이다.

대엽종 재배형 야생차의 특색: 만살 차구에 속하며 향기와 맛이 만살과 유사하며 향이 흩날리고 부드러우며 자극성이 비교적 낫다; 만살 지역과 같은 원인으로 근래 탕이 비교적 옅다.

3, 의방(倚邦)

위치: 운남 서쌍판납주 맹랍현 중북부로 육대차산에 속한다.

소개: 서쌍판납 태족 자치주 맹랍현 상명향. 의방은 태족 언어로”당랍(唐臘)” 의방이라 하는데 차 우물(茶井)이라는 의미이다. 육대차산 중에서 의방산의 해발이 가장 높아서 360여만 평방미터의 면적이 거의 고산 지역이다. 이무산과 비교하면 의방산의 해발차가 더욱 큰데 최고 1950m에 이르며, 최저는 강과 접촉하는 지역으로 565m이다. 의방산 경내에 대엽종과 중소엽종이 있는데 전문가의 측정에 근거하면 의방산 소엽종은 다른 지역의 소엽종과 달리 우수하고 대엽종 보다도 우수하다고 한다.

명말 청초에 석병인(石屛人)들이 의방에 살면서 차를 생업으로 삼아 다원을 만들고 차 상품을 개발하였다. 청 초 중기에 조정에 보내는 수백담의 보이차 공차는 의방차를 위주로 하였는데 보이차의 명성은 의방에서 시작한 것이다. 청 초부터 민국 초까지 의방은 전성기를 누렸는데 의방 행정지역 관아는 웅장하였고 차 교역이 쉼 없었으며 사람은 벅적댔고 말과 노새들이 길을 가득채웠으며 밤에도 등이 꺼지지 않아 불야성을 이루었다. 청조 중후기 보이차의 제조 교역의 중심이 이무로 이전되면서 의방의 차 산업은 쇠락하기 시작했으나 의방의 다마중진(茶馬重鎭)의 역사는 이미 문자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방산 쇠퇴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42년의 전란인데 큰 화재가 일어나 기와만 남은 폐허가 되어서 원기를 상해버렸다. 그리고 전염병까지 돌아 차상들과 백성들이 대거 이전하였다. 20세기 70년대에 다시 사람들이 이사를 왔는데 현재 의방의 인구는 30여 호 100여명으로 교통이 불편하여 빈농들이 거주하는 조그만 농촌이 되었다. 근래 보이차가 유행하면서 의방은 다시 주목을 받고있다.

중 소엽 재배형 야생차의 특색: 중 소엽종은 특수한 향으로 이름이 났으며 양 뺨에 까지 향과 단맛이 느껴지며 약간 쓴맛이 돌고, 혀 뒷부분에 쓴맛 속에서 단 여운을 가지고 있다.

4, 혁등(革登)

위치: 운남성 서쌍판납주 맹랍현 육대차산

소개: 육대차산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공명산(孔明山)과 접했고, 남쪽은 기락산(基諾山)과 강을 끼고 마주보며, 서로는 만전산(蠻磚山)과 접해있고, 북으로 의방산과 이웃하고 있다. 예부터 비교적 이름난 차 산지로 500담 이상 생산했다고 한다. 사료에 의하면 청 가경(嘉慶) 년간에(1796-1820) 공명이 심었다는 차왕수가 고사하였다. 차왕수가 말라죽은 동혈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횡으로 370mm 종으로 390mm에 이른다. 오늘날 혁등의 노차수는 몇 그루 남아있지 않아서 육대차산 중 이름만 남아있다.

대엽종 중소엽종 재배형 야생차의 특색: 중 소엽종은 특수한 향기로 유명하며 뺨의 윗부분까지 향과 단맛이 느껴지고 약간 쓰며, 혀끝에 단맛이 명확하며 혀 중 후부에 약간 쓰면서 단 여운이 있으며 차의 탕은 약간 엷다.

5.망지(莽枝)

위치: 운남성 서쌍판납 맹랍현 육대차산 지역

소개혁등산 서남방 만전산 서쪽으로 주요 집산지는 우곤당가(牛滾塘街)이다. 옛날부터 외래인들이 차 매매업에 종사하였으며 번화했던 모습이 조금 남아있다. 원시산림 속에 대 중 소엽 노차수들이 섞여있으며 거대한 차수도 적지않다. 이곳에서 생산된 차청(茶菁)은 대부분 수매처에 모아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데 일부는 대형 공장에서 특정인을 지정하여 사간다.

대,중,소엽 栽培종 야생차의 특성: 의방 혁등의 차와 유사하다. 단 느낌이 많고 탕은 부드러우며 혓바닥에 자극적인 느낌이 비교적 강하다.

6.만전(蠻磚)

위치: 육대차산

소개: 의방 혁등 만살 이무 4대산 사이에 있으며 만림(蠻林)과만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과거 만전의 연간 차 생산량은 만첨 이상이었으며 대부분 이무로 운반하여 가공해서 팔았다. 육대차산에 포함되긴 했지만 다른 차산처럼 중요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비교적 완벽하다. 고차수원은 만전에 500무 만림에 1,000무가 있는데 나무의 성장 상태가 비교적 좋고 밀도도 높아서 1무당 100그루 이상이 심어져 있으며 가장 큰 차수는 높이가 3.9m 직경이 34cm이며 수령은 300년 이상이다. 만전차구는 과도한 채집이 적었으므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있다.

특색: 다른 육대차산과 비교하면 차청의 색이 비교적 짙다; 혀와 양족 뺨 중 후단의 느낌은 두텁고 향이 자연스러우며 약간 쓴맛이 느껴진다. 맛과 향이 비교적 짙어서 만살 이무보다 떨어지나 요즘 차의 질이 수준 이상이다.

7,유락(攸樂)

위치: 서쌍판납 경홍시(景洪市) 육대차산 지역으로 유일하게 맹랍현의 정산이 아니다.

소개: 옛이름이 유락이며 지금은 기락산(基諾山)이라 한다. 육대차산중 유일하게 맹랍현 경내가 아니다. 경홍시 구내에 위치하며 동서로 75km 남북으로50km 이며 면적은 육대차산중 비교적 넓어서 고차원이 만 여무 정도이다. 해발 575-1691m 사이에 있으며 연 평균 기온은 18-20도(度) 정도이다. 연 강우량은 1400mm 정도이다. 옛날부터 유락산은 민간에서 소량의 죽통차를 만들었고 이무 의방 등지의 외부 차상들이 산차를 구매하였다. 현재 교통이 편리하여 유락차구의 차 제품은 일부 특정인을 지정해 사들이고 있다.

특색: 향과 맛은 만살 이무에 근접하며 향이 날리고 탕이 부드럽고 혀에 쓰고 떫은 맛이 비교적 높은데 수령이 보편적으로 짧고 차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8.파달(巴達)

위치: 운남 서쌍판납 자치주 맹해현 서부

소개: 맹해시 서쪽으로 58km 지역에 위치한 파달 차산은 야생차수 군락과 재배형 고차 다원이라는 양대 자원이 있다. 1961년 파달 대흑산(大黑山)에서 높이 50여m 수령 1700 여년의 거대한 “파달 차왕수(巴達 茶王樹) 을 발견하였는데 파달 차원의 보물이 되었다.

특색: 수량이 많지 않고 입안의 느낌은 포랑산(布朗山) 차와 유사하며 혀 안쪽과 양 뺨 후단 부분에 약간 쓰고 떫은 맛이 느껴진다. 평균 차의 질은 농도가 얇고 양 뺨 중간 부분에 특수한 냄새가 있다.

9.포랑산(布朗山)

위치: 서쌍판납 맹해현에 있으며 원래 맹해차창 1차 가공 소재지에 속했다.

소개: 맹해현 남방 80여km 거리에 위치하는데 면적이 1016여 평방미터이며 포랑족 1만 여명 거주한다. 포랑족은 해발 2082m의 삼타산과 최저 해발 535m의 남란하(南覽河)와 남길하(南桔河) 교차 지점의 산비탈에 거주한다. 포랑족은 고대 복인(濮人)의 후예이며 차를 栽培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차를 栽培하고 만들고 음용 하였다.

국영 맹해차창 시기 포랑산 차원은 1차 가공지로 포랑산과 신구 반장(新舊; 新老 班章)을 포함하는데 1년에 찻잎 300여 톤을 수확하여 대략 쇄청 모차 80여 톤을 제작 할 수 있었다.

야생 방임차의 특색: 입안에 자극성이 조금 강하고 혀와 양 뺨 중간 부분에 약간 쓴 맛이 있다: 반장차와는 다르게 양쪽 뺨에 향이 짙고 맛이 묵직하다.

10,반장(班章)

위치: 서쌍판납 맹해현

소개: 맹해현 남쪽 대략 60여km 거리이며 평균 해발이 1700m 이다. 원래 맹해차창 포랑산에 속했는데 신(新) 구(舊: 원문에는 老) 반장차의 구분이 있다. 국영 맹해차창은 1988년 신 반장의 현재 지역에 3502무(畝)의 다원을 만들었다. 재배형의 고차원 수천 무는 구 반장(老 班章) 구 만아(老 曼娥) 등에 분포 되어있다.

야생 방임형 차의 특색: 이 차는 노 반장 차구에 속한다. 운남 대엽종 가운데 포랑산과 향과 입안의 감촉이 유사하며 질이 비교적 중하며 입 속에서의 느낌은 자극성이 더욱 강하고 혀에 쓴 맛이 가장 강하고 향기가 가라앉는 듯하고 혀끝과 뺨 윗부분에 느낌이 뚜렷하지 않다.

11,남나산(南懦山)

위치: 서쌍판납 맹해현 원래 맹해차창 1차 가공 소재지이다.

소개: 맹해현 동쪽이며 평균해발 1400m이다. 태족 언어에서 남나의 뜻은 순장(筍醬)이다. 고대 남나산 주민은 하니족이 주중을 이루었는데 먹고 남는 많은 죽순으로 죽순 장을 담았는데 당시 고을 수령이 좋아하여 매년 죽순 장을 공납하도록하였고 뒷날 이것을 산의 명칭으로 삼아 남나산이 되었다.

하니족의 분파인 아이니 족은 1100여년 전에 당대(唐代) 남조시기(南詔時期)에 남나산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니 족이 남나산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포만인(浦蠻人)들이 정착해 있었다. 포만인은 오늘날의 포랑족이며 최초로 남나산에 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현재 남나산에는 천여 핵타의 혼생 고차수원이 남아있는데 천여년전에 포랑족이 심어서 황폐되고 남은 다원이다.

야생 방임형차 의 특성: 향이 날리며 달고 입에 자극성이 비교적 높은 대표적인 상품이다. 양쪽 뺨 중간과 혀 끝에 달고 향기로운 감촉이 남고 혀 중간에 단 맛이 난다. 탕은 부드럽고 떫은 정도가 약간 높다.

12, 맹송

위치: 서쌍판납주 경홍시(景洪市) 남부

소개: 사쌍판납에는 두개의 경송이 있는데 맹해현과 경홍시에 나뉘어 속한다. 이 문장에서 다루는 맹송은 경홍시 남부의 맹송이다. 동쪽으로 포랑산(布朗山)과 접경하면서 남으로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맹송은 태족어 지명이며 고산 사이에 있는 평지라는 의미이다.

맹송의 아카인(Akha)은 18세기 남나산에서 이주하였는데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다양한 생물 자원이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다. 맹룡 맹송지역에 많은 재배형 야생차림이 있는데 옛 포랑족들이 심은 것들이다. 야생차 품종 중에서 현지 포랑족은 쓴차(苦茶)와 단차(甛茶)로 구분한다. 고차는 쓰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서 목을 넘기기가 어렵고, 차농들이 채취하여 차를 만드는 것은 첨차류 이다.

야생 방임형차의 특색: 차가 향기롭고 달며 양 뺨과 혀의 뒷부분에 특별한 냄새가 난다. 혀의 뿌리 부분에 쓴 맛이 명확하고 거북하다. 근래 이무차 가격이 오르자 수공업자들이 맹송차로 이무차를 모방하여 팔고있다.

13, 경매(景邁)

위치: 운남성 사모시 난창현

소개: 운남성 사모시 난창현에 속한 경매 차구는 경매촌과 망경촌(망景촌)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천여종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만여무의 栽培형 고차 다원이 있으며 현재 운남성에서 발견된 가장 큰 고차원이다. 2003년 미국 국적을 가진 대만 사업가인 채림청(蔡林靑) 선생이 “난창 유령(瀾滄裕嶺) – 고차원 공사(古茶園公司)”를 설립하였고 경매 다구의 50년 채집권을 얻었다. 과학적인 관리와 보호 하에서 유가 처 제품을 제한적으로 만들어서 고차림이 과도하게 채취되는 액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경매 차구의 역사적 근원은 서기 696년 포랑족의 조상들이 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후에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개간에 노력하여 오늘날 만 여무의 규모에 이르렀다. 고차림내에 노차수에 방해각(螃蟹脚)이 기생한다- 열을 내리고 해독 작용이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방해각은 경매 지역의 특수한 환경과 백년 고차수라야 기생하는데 경매 다구의 특산물이라 한다.

중 소엽 야생 방임차의 특색: 차청의 색깔이 청록색이며 잎 줄기가 비교적 짧고 경 발효한 달고 향기로운 차로 이름이 높다; 양 뺨 중 후부에 시원하고 달며 꽃 향을 띠는 특징이 있다. 혀 표면 중간에 단맛이 뛰어나며 탕은 부드러우나 비교적 엷다.

14,맹고(勐庫)

위치: 운남현 임창시 쌍강현(雙江縣)

소개: 임창의 맹고 야생차 군락은 현재 발견된 세계 최고 해발에 위치하며 밀도가 가장 큰 대리 차종 군락이다. 생장 군락은 쌍강현 대 설산 중상부에 위치하며 분포 면적은 대략 만2천 여 무로 해발 고도가 2200-2750m 이다. 맹고 야생 고차원은 야생형 야생차이며 진화 형태상 보이차 종보다 더 원시 종에 가깝다. 이 차종은 차나무의 일체 형태상의 특징과 차나무 효능 성분(폴리페놀 타닌 카페인 등)을 갖추고 있으므로 차로 만들어 음용 할 수 있다; 유전자가 원시적이기 때문에 고 해발, 한랭한

보이차 보관에 관한 실험

보이차의 보관에 관한 실험

출전: 新境雲南普洱茶網
저자: 石昆牧

1-2년 된 차를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되어야 차가 맛있는가 등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본인도 2년 된 생차부터 40년 된 생차 까지 골고루 가리지 않고 마시지만 다 나름 대로 장단 점이 있다고 생각 된다. 서장 신장 사람들은 1-2년 된 보이차를 마시는데 아무 이상이 마시는 걸 보면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을 듯하다. 이런 생차의 차기가 좋아서 자주 마신다. 내가 마시는 2-3년된 차는 단지 다원 차가 아니라 교목 생차 라는 점이 차이겠지만. 교목 생차는 다원 차 또는 녹차 철관음 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이 있어 상당히 즐겨 마시는 편이다.

7-8년 차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차는 50년 된 고차수 죽통 차와 50년 정도 된 하관 철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이차와 별차이가 없으면서 독특한 향이 사라지지 않은 50년 지난 죽통차는 차를 배운 이후로 내가 처음 느껴 보는 감동이었다. 지금도 200g 정도 남은 죽통 생차를 몰래 간직해 두고 꺼내지도 않는데 이후 어떻게 변할지 자못 궁금다. 그 후 또 한번의 감동은 50년쯤 된 하관 철병을 먹으면서 맛본 감동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그런 향기로운 청향과 신비한 차 기운을 간직하고 잇는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 차 이후로 생차를 좋아 하게 됐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암만 좋고 오래 된 차를 마셔도 감동을 받지 못했으니 불행의 시작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입 맛 버려 놓은 사람 책임져요. 철병 한 축만 어케 안되나요? ㅋㅋㅋ 평생 게…. )

한동안 감동이 없다가 올 초 잘 익은 4-50년 된 홍인을 맛보고 오랜 만에 감동을 받았다. 실내 가득 풍겨 오는 대추 향이 짙은 홍인의 향도 잊지 못할 추억이리라. 그런 차들을 마시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벌고 싶지만 현실은 …….

아주 큰 감동을 받은 건 아니지만 98년 野生 청병를 처음 대했을 때 감동도 작지 않다. 그 짧은 숙성 기간에 그처럼 향기롭고 달콤하며 목에 안 걸리는 차는 아마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좀 가지고 있으니 두고 두고 맛 보며 어떻게 변하는가 관찰해 보리라 다짐 해본다.

이처럼 보관 기간이 짧건 길건 각종 차들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마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몇 년 된 것이 좋다 라기 보다 어떤 맛을 좋아 하느냐가 더 중요 한 것 같다.

아래의 글은 대만 사람이 차를 보관하면서 어떻게 변하는가를 관찰하며 보관 조건이 어떤가를 같이 서술하였다. 몇 년 된 차를 마시는 것이 좋은 지 정설이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를 바라는 마음에서 번역해 봤다. 2-3 시간 사이에 대충 번역해서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대만과 우리나라가 기후 지리 환경이 달라서 동의 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공부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번역해 봤다. 의견이 다른 분들도 딴지 거시지 마시고 참고로만 읽으시길 바란다. 재목도 살짝 바꿧는데 이해 하시길 바란다.(원제: 普洱茶的存放环境与陈化) 내용상 문맥이 맞지 않을수도 있으니 작자 잘못이 아니라 번역자 실수로 이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一. 일반적 상황 하에서의 보관

필자가 보이차를 보관했던 경험에 의거하면 보이 생차의 보관조건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한 네티즌의 형용을 빌면 “사람이 장시간 생활할 수 있는 곳 이라면 보이차를 보관하기에 적합하였다”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보이차의 보관상태는 주로 4가지 중요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온도, 습도, 통풍, 안 좋은 냄새가 없을 것; 다음 요소로는 쌓여서 압력에 눌리지 않게 하는 것과 창고의 물건 뒤집기 등 이다. 필자와 친구들이 보관했던 보이차의 환경은 온도가 섭씨 20-30도 사이였고, 상대습도는 65-75%,통풍이 잘되고 잡다한 냄새가 나지않았으며, 양이 적었기 때문에 압력에 눌리거나 위치를 바꾸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숙성된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맹해차창 7542, 7532, 8582 생병 시리즈.

이 계열 차 제품은 모두 서쌍판납의 차청을 사용하였고 다소 연기에 그을린 맛이 나타난다.

3년째에 이르러 차의 풋내와 그을린 냄새가 조금 낮아졌다

4년째에 이르러 차의 표면이 약간 밝아지며 향기가 조금 좋아졌으나 입 속의 감촉은 변화가 크지않았다.

6-8년째에 이르러 차 표면 차청의 잎 새 모양이 명확해지기 시작했으며 병 자체는 압축이 약해지고 향기가 코에서 인후까지 내려갔다. 입 속의 감촉에서 풋내(靑味)는 약간 있었으나 탕은 윤기가 흘렀다.

10-12년째 잎새가 명확해지고 인후에 숙성된 향이 오래 남으면서 시원한 느낌을 주었고, 풋내가 점진적으로 사라지며 묵힌 향이 출현했으며 약간 꽃과 꿀의 향이 있었다.

13-15년째 차의 표면에 윤기가 흐르며 잎새가 분명해지고 병 자체 압축이 느슨해졌으며 포장지의 그림이 번지는 현상이 출현하였다. 늦차를 홍배한 냄새와 유사한 향기가 나면서 찻잔바닥에 향기가 남았다.

20년째 7532는 홍차(완전발효)와 유사한 향기가 출현하였고 여운이 길고 차의 기가 충족했으며 인후의 시원한 느낌은 더욱 진하고 명확했다; 탕 색은 호박(琥珀)과 같아서 끈기와 점성이 있었다; 필자의 개인적인 기호에 따르면 이정도의 년 수와 상태가 마시기에 가장 알맞은 것 같다.

2.맹해차창 소방전차 갑급타차

이 계열 차 제품도 서쌍판납 차청을 사용하여 아차를 위주로 만들었는데 병차에 비해 긴압도가 높으며 때때로 맛을 좋게 하기위해 특수한 차종을 사용하거나 병배를 하였으므로 이 계열 차는 연기에 그을린 냄새가 비교적 약하다.

4-6년째 차의 풋내가 조금씩 약지고 차 표면이 조금 맑아졌고 향기는 좋아지고 입의감촉이 부드러워졌다.

8-10년째 차청의 잎 모양이 점차 뚜렷해지고 압축도가 약해졌으며 청향은 그대로였으나 맛은 달아지고 약간 풋 냄새를 띠었다.

12-14년째 타차의 잎이 분명하고 인후에 숙성된 여운이 있었으며 풋냄새는 명확했지만 미약한 꽃 향기가 있었다.이나타났다

16-18년째 타차 표면에 기름기가 흐르고 잎새가 뚜렷해졌으며 타차 자체는 압축이 풀어지고 탕 색은 홍갈색(赭红)이 나타났다. 맛은 여전히 풋냄새가 있었으나 꽃과 꿀의 향기를 지니고있었고 탕은 부드럽고 달았으나 약간 떫었으며 인후에 명확하지는 않지만 시원한 느낌이 나타났다.

3.하관차창 중차패 간체자. 중차패 번체자 8653

이 계열 차는 통상 하관차 지역(보산.임창 및 사모지역)의 차청을 사용하였으나 중차패 간체자는 역사적으로나 실제 향기로 보나 서쌍판납 차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관차창의 7자병차는 압축이 맹해차창보다 강하고 차청의 등급도 비교적 더 성장하였다;그러므로 같은 병차라도 같은 환경 하에서 하관 차창의 병차 숙성속도는 조금 늦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특수한 맛이 있을 수도 있다. 하관차창 차의 특색은 다른 지역 차들 과는 달리 약간 꽃과 꿀의 향을 가지고 있다

하관차창 차 제품은 약간 그을린 맛이 있으나 비교적 쓰고 떫으며 향기가 깊다.

4-6년째 풋내가 약간 떨어지고 표면이 조금 맑아지면서 향기는 좋아지고 맛은 부드러워 지지만 쓰고 떫은 맛은 변화하지않았다.

8-10년째 차청의 잎새가 점차 명확해지고 표면은 맑아졌으나 청향 정도가 여전히 그대로 였다. 맛은 쓰고 떫은 맛이 조금 변화됐으며 단맛이 조금 있었지만 풋냄새는 여전했다.

12-14년째 잎새가 조금씩 뜨기 시작하였고 인후에 묵힌 여운이 조금 있었다. 풋냄새는 선명했고 꽃 향이 조금 있었다.

16-18년째 표면에 윤이 나고 잎새가 더욱 명확해졌으며 압축이 약간 풀렸다. 탕 색은 붉고 맑았으며 맛은 여전히 풋냄새가 났으나 꽃 향이 더욱 분명해졌다. 탕은 부드럽고 달면서도 약간 쓰고 떫은 맛이 있었다.

25-28년째 잎새가 분명하고 병 포면은 기름졌다. 탕 색은 호박색이 되었으며 맛은 꽃 향이 명확해 지고 탕은 부드럽고 진했으며 쓰면서도 단맛이 돌면서 떫은 맛이 구수하게 변화하였는데 숙성 속도가 늦기 때문이다. 이 때가 되어야 인후에 시원한 느낌이 나타난다. 차성이 강한 차를 좋아 하시는 다우들은 이 시기의 차가 마시기에 가장 좋을 것 같다.

4. 보이 숙차류

1973년부터 곤명 차창에서 인공 속성 발효된 현대 보이차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속칭 보이 숙차이며 근 수 십 여년 동안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필자는 보이차를 접하면서부터 십 수년간 습관적으로 홍콩 차창에 저장했던 숙차를 마셨는데 소장하던 차중에 8592숙병 7663숙차가 주종이었다. 소장의 경험 속에서 숙차는 이미 인공 속성 발효 되었기 때문에 다시 고온 고습 처리를 하지 않으면 8-10년 내에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악퇴 향은 조금 약해 졌지만 맛은 변화가 없었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보관 한다면 특별한 맛이 나타날 수 없다.

5.栽培형 野生차

필자는 근 100여년의 운남 차 산업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연구한 후 운남 차 생산 지역을 여러 차례 왕복 하면서 현지 다원 관리와 수령 등 관련된 정보를 이해 하였다. 아울러 모든 인자급 차와 호자급 차의 엽저를 관찰 해서 이러한 노차들에 사용한 차청은 결코 野生차가 아니며 당초 백성들이 꺾꽂이를 거쳐 野生 방임한 다원차 임을 발견하였다. 단지 이런 차종들은 모두 野生차와 같은 원시차에 속하며 인공 배양한 개량차가 아니므로 차질과 차성이 비교적 강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근대에 완전히 栽培형 野生 차청으로 압축한 압축차는 1997년에 3종이 탄생하였고 1998년도 수종의 병차와 전차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차청과 제작 과정이 차이가 크므로 현재까지 완전하고 명확한 자료를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栽培형 野生차는 5-6년째에 첫번째 완전 변화가 나타나는데 다원차에 비해 1-2년 빠르다. 그 특색은 인후의 여운이 깊고 넓게 펼쳐지고 향기는 인후에서 빠르게 모습을 감추는데 삼키고 호흡하는 사이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훗날 이런 차는 반드시 다른 풍모와 품격을 드러내겠지만 숙성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수한 차가 되거나 장기 보존에 유리 할지는 계속 관찰을 거쳐야 할 것 같다.

二. 특수한 환경에서 보관

1.항아리(瓮)

같은 차를 한 개의 병차로 보관, 원래 죽 제품 포장으로 보관, 봉인된 종이 상자에 보관 그리고 항아리에 보관 하는 것은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일전에 소장가들은 대부분 소량 장기 보존하는 상황에서 자사항아리에 보관한 차가 가장 좋다는 것에 동의 했다. 자사항아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ㄱ. 통풍성이 뛰어나다.

ㄴ. 산소의 흐름이 너무 빠르지 않아서 향기를 보관할 수 있다.

ㄷ.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는 법이다. 자사 항아리는 밀폐성이 뛰어나고 향기를 보존하며 맛도 비교적 진하다. 하지만 숙성 속도가 비교적 늦고 공간을 차지한다. 소비자분 들이 보이차를 항아리에 보관할 때 지면에서 적어도 10cm이상 떨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물이 스며들 수 있어서 차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2. 고온고습

고온 고습이라는 것은 차가 섭씨 30도 이상 상대습도 85%이상 심지어 100%에 달하는 통풍이 안 되는 환경을 말한다. 보이 생차가 이러한 환경에서 하얀 태(白霜)가 신속하게 생기서 (이 백태가)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 시간이 오래 되면 차가 급속 숙화 되고 향기가 떨어지며 맛이 신속하게 부드러워 지고 달아져서 완전히 보이차가 갖추어야 할 차질과 차성을 잃게 된다.탕 색도 검붉어서 맑지 않다. 만일 과도하게 숙성되면 엽저에 검고 딱딱해지는 현상(黑硬現象)이 출현하고 맛은 달지만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숙차류가 만일 고온 고습을 거치게 되면 짧은 시간 내에 수공업자가 말하는 숙차 장향이 나타난다; 만약 적당하게 출입을 반복하게 되면 차청이 목질화 현상이 나타나서 이른바 삼향(參香)이 나타난다.

3.고온저습

고온 저습 이라는 것은 차가 장시간 섭씨 30도 이상, 상대 습도 80% 이하의 환경에 두는 것을 말한다. 만일 새로 만든 보이 생차를 이런 환경에서 장기 보관하면 입 속에 넣어도 불쾌감을 느끼는 산화 현상이 나타나고 통풍조차 안 된다면 산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진다. 이런 고온 저습의 통풍 환경은 상인들이 사용할 때 빨리 창고에서 꺼내면 창고의 향과 백상현상이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면 창고의 묵힌 맛은 없어져도 백상은 남아서 차청이 검고 맑지않은 현상이 사라지지않고 맛도 숙차처럼 된다.

4.저온고습.

이른바 저온 고습은 차를 장시간 섭씨26도 이하 상대습도 85%이상 심지어 100% 통풍이 되지않는 환경을 말한다. 이런 환경은 조기 홍콩 창고가 대표적이며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이 방법으로 저장한다. 지하실에서 물을 뿌리거나 젖은 솜이불로 덮으므로 곰팡이가 신속하게 번식한다. 보이차 생차는 이런 환경 하에서 곰팡이가 급속하게 번식하기 때문에 쉽게 변질되고 숙화 된다.

5 저온저습

저온저습은 차가 장시간 섭씨 26도 이하 상대 습도 80% 이하 통풍이 잘되지 않는 환경에서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많은 차창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차성을 유지할 수 있고 콘트롤이 적당하면 품질이 나빠지는 일이 적다. 이러한 차창의 백상(白霜)은 차 제품 자체의 습기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안팎으로 고르고 빽빽하게 만들어져서 훗날 차가 숙성하는데 포지티브한 도움을 준다. 고온고습창고와 마찬가지로 숙차류는 만일 고온고습을 거쳤다면 단 시간 내에 수공업자들이 말하는 숙차 장향을 만들어낸다; 만일 다시 적당하게 창고에 넣었다 꺼냈다를 반복하면 차청에 목질화 현상이 출현하고 삼향도 나타난다. 전체과정이 비교적 길어지면 숙차의 차성이 비교적 완벽하게 유지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차의 위생에 대한 근심 때문에 숙차는 정상적인 환경에서 저장한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6.통풍

상술한 특수 조건 중에서 온도 습도 외에 통풍도 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새로 제조하거나 막 공장에서 출품한 차 제품이 만일 차 자체가 제대로 마르지 않고 통풍 조차도 열악하다면 차 내부에서 곰팡이가 생긴다. 곰팡이가 유익한 균이건 아니건 따질 필요 없이 완전히 다른 저장 환경이 조성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면 통풍 정도는 창고에 넣은 차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7.압력

필자는 대량으로 차를 저장할 때 또 다른 현상을 발견했다. 종이 상자에 넣어 보관할 정도로 차의 양이 많을 때 창고를 정리 하다가 가장 밑에 있는 차를 꺼내 통풍이 잘되는 곳에 두면서, 아마 압력 때문에 차의 향기가 안으로 응집되고 차 표면에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기름(状出油)이 나오는 상황을 발견하였다. 이런 현상은 좀더 관찰하고 수량화 정리를 거쳐야 실증 할 수 있을 듯하다. 필자는 온도 습도 통풍이 교차 영향을 미쳐 차의 숙성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으리라 추측 해 본다.

출처 : 천진 진향 보이차 |글쓴이 : 진향 [원문보기]
천진 진향다실

자사호란?

<<자사차호란 무엇인가? >>

넓은 의미에서 자사차호(紫砂茶壺)는 자사로 만든 차(茶) 우리는 그릇을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자사차호는 중국 이싱(宜興)에서 나는 독특한 광물질인 자사를 재료로 삼아야 하고, 자사공예의 제작규범을 따라야 하며, 이싱에서 만들어진 차호여야 한다. 즉 자사차호란 엄밀하게 이싱 자사차호인 것이다.

이싱 자사차호는 그 이름과 달리 자색빛의 차호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성질을 가진 자사 원료일지라도 그것으로 만들어낸 차호의 색상은 여러 가지여서, 붉은빛·자줏빛·검은빛·풀빛·배껍질빛 등의 차호가 나오는데, 이것들도 모두 자사차호라고 부른다. 즉 자사차호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호의 빛깔을 가리키는 말이기 이전에 자사라는 특정 재료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볼 수 있다.

진품 자사차호는 상대적으로 고가품이다. 그것을 만드는 재료의 채취과정과 제련과정이 복잡하고 제작기법도 섬세할 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수공작업에 의존해야 하며, 굽는 과정에서도 고온을 써야 하고 이로 말미암아 수축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모양과 빛깔뿐인 가짜 자사차호와 진품 자사차호 사이의 가격 차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 더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사 원료 자체가 희소가치를 지니게 되어 그 가격이 더욱 올라가고 있다.

그럼에도 자사차호는 그 성질의 우수성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공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특징 때문에 예술가치가 높은 수장품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자사차호의 재료Ⅰ

이싱에는 자사의 원산지인 황룽산(黃龍山)이 있는 바, 이 산을 일러 이른바 자사의 본산(本山) 또는 갑산(甲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밖에도 칭룽산(靑龍山)이나 단산(段山)이나 양자오산(羊角山)이나 샹산(香山) 등이 있는데, 각 산들에서 나는 자사의 재료는 성질이나 빛깔에서 조금씩 다르다.

자사니 가운데 가장 핵심에 들어 있는 양질의 광물질을 일러 니중니(泥中泥, 본산니 가운데 본산니)나 갑니 또는 갑급니(甲級泥)라고 부르며, 이것이 자사차호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자사의 광물 원석을 중심으로 살펴볼 경우, 자사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자니와 홍니와 녹니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지표에서 가장 가까운 층에 주로 있는 원석 자니를 소성하면, 자색·이피(梨皮, 배껍질)색이라고 부르는 황색·회흑색의 남니(중국 사람들은 흑색이라고 표현함)라고 하는 세 가지 최종 니료(泥料)가 나오게 된다.

다음으로 자니보다 깊은 층에 있는 것이 원석 홍니인데, 이 붉은 색의 돌덩어리를 흔히 석황(石黃)이라고도 표현하는 바, 이것을 소성시키면 붉은색인 주니와 남니 두 종류의 최종 니료가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원석 녹니는 외형상 광석의 외면에서 녹색을 띠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소성시키면 황니와 녹니 두 가지 최종 니료를 얻게 된다.

자사차호의 재료Ⅱ

먼저 자사원석을 캐야 하고, 그것을 다시 잘게 부수면서 불에 구워야 하는데 이를 일러 ‘소성’(燒成)이라 부른다. 소성과정을 통해 일반 도토(陶土)가 가지는 점성을 얻을 뿐 아니라 자사라는 암석만이 가진 독특한 특성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소성을 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그것을 가루로 내어 곱게 만들고 또 그것을 물과 배합하여 진흙덩어리와 비슷한 형태로 만든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공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진흙 같은 형태의 자사 니료를 가지고 곧바로 차호를 만들 수도 있지만, 습도를 유지하면서 ‘묵히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을 일러 ‘존방’(存放) 또는 ‘진방’(陳放)이라 부른다. 존방을 함으로써, 불완전하게 공존하고 있던 흙의 성질과 암석의 성질이 서로 작용하여 독특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된다. 따라서 오래 존방한 니료일수록 자사차호를 만드는 좋은 재료라고 볼 수 있는 바, 이런 자사니료를 일러 ‘노니’(老泥)라고 부른다.

마방이나 수니창을 통해 생산되는 자사재료에는 대개 다섯 가지 색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자색을 띠는 것이 많은데, 이를 일러 자니(紫泥)라고 부르며, 그 밖에 붉은빛을 띠는 주니(朱泥)가 있고, 검은 빛을 띠는 흑니(黑泥)도 있으며, 또 풀빛을 많이 띠는 녹니(綠泥)와 쌀색이나 배껍질색에 가까운 단니(段泥)가 있다. 이것을 일러 일반적으로 자사의 5색이라고 부른다.

자사차호의 제작

먼저 어떤 모습의 얼마만한 차호를 만들지에 대해 설계를 해야 한다. 설계가 완성되면, 이제 니료를 두들겨서 니료편을 만든다. 그리고 설계에 맞추어 니료를 재단하되, 중심이 되는 차호몸 부분부터 재단하여 몸통을 만든다.

몸통을 만든 다음에는 바닥부분을 만들어 붙이고, 몸통을 고정시키기 위해 뚜껑과 맞물리는 윗부분까지 붙여둔다.

다음으로 찻물이 흘러나갈 구멍을 만들고 거기에다 부리 부분을 만들어 구멍을 뚫어서 붙이며, 손잡이 부분도 만들어 붙이되, 몸통과 부리와 손잡이가 보통 수평이 되도록 한다.

그러면 이제 뚜껑과 맞물리는 부분에 붙여둔 것을 잘라내고 거기에 맞추어 뚜껑을 만든다.

이처럼 모양이 완성되면 차호몸의 내부를 다듬고, 바깥부분도 설계한 내용에 따라 알맞게 다듬는다. 그런 다음 필요한 부분에 낙관을 찍고 항아리 등에 넣어 햇빛에 노출시키지 않고 천천히 말린다.

자사차호를 구울 때, 지난날에는 ‘용요’(龍窯)라고 불리는 거대한 가마를 썼는데, 요즘에는 대부분 현대화된 전기가마나 가스가마를 쓴다. 그것이 1,200℃라는 온도를 맞추기에 쉽고 굽는 시간도 짧기 때문이다.

자사차호의 형태와 종류

기본 형태에서 자사차호는 차호몸과 차호뚜껑으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는 자사차호의 절대적 구성요소다.

다음으로 차호몸에는 찻물을 토해내는 부분과 손으로 잡는 부분 및 뚜껑과 맞물리는 부분 그리고 바닥과 차호의 배 부분이 있어야 한다. 찻물을 토해내는 부분은 다시 몸체와 연결되는 구비 부분과 찻물이 나오는 부리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뚜껑부분은 몸체와 맞물리는 입술 부분과 공기구멍 및 공기구멍을 포함하는 뚜껑구슬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요소를 가진 차호들은 다시 다양한 형태로 나누어지는데,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나눌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서너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차호몸이 둥근 원형으로 된 자사차호를 꼽을 수 있는데, 이 형태의 차호를 일러 보통 원형차호(圓形茶壺) 또는 원형기(圓形器)라 부른다.

둘째, 차호몸이 각지게 생긴 자사차호를 들 수 있는데, 이를 일러 방형차호(方形茶壺) 또는 방형기(方形器)라고 부른다.

셋째, 넓은 의미에서 자연 사물을 모사한 자연형차호(自然形茶壺)가 있다. 자연형 차호는 다시 화형기(花形器)와 근문기(筋紋器)로 구분하는 것이다.

자사차호의 특징

엄밀한 의미의 자사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일반 재료와 달리 이싱의 서남부 지역에서만 나는 독특한 광물질이다. 또 이싱 자사차호가 붉은빛과 검은빛 등을 내는 까닭은 재료 자체의 특성 때문이지 색료를 섞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사차호는 원칙적으로 수공제품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싱 자사차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질은 과연 무엇일까?

첫째, 이싱 자사차호는 열전도율이 높다. 구리나 쇠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열전도율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 재질에 그런 광물질이 다량 함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1,2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졌기 때문이다.

둘째, 열전도율이 높은 대개의 물질들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것과 달리 자사차호는 제대로 만든 옹기처럼 숨을 잘 쉰다. 특히 우수한 자사차호는 차를 우리는 짧은 시간 사이에도 숨을 쉬어, 우려낸 차의 맛과 색과 향을 다르게 만든다. 자사의 재질이 갖추고 있는 광물적 성질과 제작기법의 정교함으로 말미암아 자사차호가 상당히 얇기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자사에 함유된 광물 성분에는 인체에 유익한 요소들이 아주 많은 것으로 밝혀진 바, 이싱 자사차호는 건강에 유익하다.

넷째, 차를 우리면서 차의 성질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차호에는 반드시 적정 온도를 길게 유지하는 보온성이 있어야 하는데, 자사차호는 상당히 얇으면서도 그런 점에서 매우 우수한 성질을 갖추고 있다.

다섯째, 차의 기운을 잘 살려낸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보다 현대적인 측면으로 바꿀 때, 좋은 차호는 웬만한 고온에서 특별한 내부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엄청난 고온에서 구워낸 자사차호는 그런 점에서도 아주 뛰어난 장점을 갖추고 있다.

자사호의 양호

아래 글은 다소롬님 블로그에서 옮겨 왔읍니다.

<<차호(茶壺)와 양호(養壺) >>

1. 자사(紫砂)차호와 그 역사

중국의 차도구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자사차호부터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중국 차도구에는 차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핵심적인 차도구는 바로 차호이기 때문입니다. 또 차호 가운데서도 자사차호가 중국차를 대표하는 차호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역사상 북송(北宋)시기에 쟝쑤(江蘇)성 이싱(宜興)에서 이미 자사차호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자사차호는 오늘날의 것처럼 애기주먹처럼 작지 않았고 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마시는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사로 만든 차주전자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그런 자사차호는 명나라 정덕(正德)년간에 이르러 비로소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자사차호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이싱 교외에 있던 진스스(金沙寺)라고 하는 사원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대 그 절에는 차마시기를 좋아하는 중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자사를 가늘게 빻아 차호를 만든 뒤 그것을 불에 구워 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전형적인 자사차호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허나 아쉽게도 이것은 문헌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그 승려가 만든 자사차호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뒤 그 승려의 전통을 이은 어떤 이의 작품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당시 진스스에 방을 빌려 머물며 과거를 준비하던 우이산(吳이山)이라는 서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라와 진스스에 머물고 있던 책심부름꾼 가운데 꿍춘(供春)이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진스스의 그 승려가 자사차호를 만드는 것을 보고 크게 흥미가 생겨서 임시방편으로 나무를 깎아 차호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일러 오늘날엔 꿍춘호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는 그 승려로부터 배워서 중국역사상 최고의 자사차호 제작가가 됩니다.

그 뒤 자사차호의 명가들이 등장했는데, 명나라 만력(萬歷)년간의 '4대가'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퉁한(董翰), 자오량(趙梁), 웬창(元暢), 스펑(時朋) 등인데, 그들의 뒤를 이어 이우린(李茂林)이나 스펑의 아들인 스타빈(時大彬) 등도 이름을 날린 명가에 속합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무렵에 이르면, 자사차호에 드디어 낙관을 새기는 습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차호의 모습도 다양해지며, 나름대로 격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사차호의 예술적 가치도 점점 높아집니다. 이제 자사차호는 실용성과 예술성의 결합체가 되어 중국차문화의 중요도구로 정착됩니다.

2. 자사차호의 뛰어난 점

자사차호는 왜 중국차문화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을까요? 그것은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뛰어난 점을 다른 차호가 대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사차호는 무엇보다 보온성이 뛰어납니다. 또 기(氣)가 잘 드나들며 오랫동안 사용하더라도 차호가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차엽의 향기나 맛을 다치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엽의 성질을 잘 살려줍니다.

다음으로 자사차호는 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가치는 오래 쓰면 오래 쓸수록 더욱 높아지는 자사의 성격 때문에 더욱 높은 가치를 평가받아 왔습니다.

3. 자사차호의 재료와 형태상 큰 갈래

일반적으로 자사차호는 형태상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세하게 나누자면 끝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살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꾸준히 관심을 두다 보면 그것은 차츰 저절로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큰 갈래의 처음은 기하형(幾何型)이고, 다음은 모방형(貌傍型)이며, 마지막은 근문형(筋紋型)입니다.

가. 기하형

기하형은 둥근 원형이나 네모난 방형 등의 형태를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이용한 것인데, 이런 차호의 외형은 간단소박한 경우가 많으며, 이 가운데 원형이 일상적으로 자주 쓰입니다.

나. 모방형

모방형은 말 그대로 나무나 열매나 동물 및 정자 등 여러 사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나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이런 차호의 외형은 예술적, 문학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으로서, 일상적으로는 배나 복숭아 등의 열매를 형상화한 것과 거북이나 용 등을 형상화한 것이 많은 편입니다.

다. 근문형

근문형은 차호의 형태와 뚜껑의 형태 및 손잡이 등의 형태를 잘 배합하여 그것을 비례비로 묘사해낸 차호를 가리키는데, 그 기준은 사람과 그 문화를 잘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흔히 실용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고급형 다기에서 이런 형식을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자사차호라고 할 때, 자사가 꼭 자색인 것만은 아닙니다. 자사차호의 재료를 자사 도는 자사토광(紫砂土廣, 광자는 흙토변에 쓰지만 지원안됨)이라 부르는데, 차호의 재료로 열처리가 안된 자사는 광물성 덩어리이며, 기본색은 3가지입니다. 이것을 일러 각각 자니(紫泥)와 주니(朱泥)와 본산녹니(本山綠泥)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본산녹니는 열처리를 할 경우, 약간의 누른 빛을 띠게 되어 마치 마른 대나무와 비슷한데 이를 일러 단니(緞泥)라고 부릅니다. 그밖에 열처리를 한 경우 고동색을 띄는 남니(藍泥)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이쓰이는 것은 자니입니다. 그래서 통칭 자사라고 하거나 자니라고 하며 자사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화학적 기술의 세분화로 이런저런 다양한 빛깔의 자사차호가 나오며, 이런 것들을 섞어서 다시 특이한 빛깔의 자사차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사차호가 자빛이라는 생각은 버리되, 단 자사광이 아닌 다른 화학재료를 넣은 것과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자사차호를 선택하는 방법

자사차호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물론 실용성입니다. 아울러 예술적 공예성도 가진 것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실용성이 없는 차호는 아무리 예술적으로 보이더라도 이미 차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요즘에는 순수예술성 차호가 이른바 명가들에 의해 곧잘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실상을 저버린 오늘날의 행태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자사차호는 좋은 자사광을 쓴 것이어야 합니다. 또 자사광을 잘 열처리한 것이어야 하는데, 잘 열처리된 좋은 자사광으로 만든 차호는 자사광에 함유된 철분으로 말미암아 단단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길 경우, 맑은 금속성의 소리를 내게 됩니다. 지나치게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자사광이 아닌 다른 물질 예를 들어 흙 등이 많이 함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밖에도 가격과 비교하여 적당해야 하며, 사용하고자 하는 용량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또 외관이 깨긋해야 하며, 흠집이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 기준에 따라 자사차호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가. 먼저 차호에 물을 반 정도 붓고 뚜껑을 닫은 다음, 손으로 차호뚜껑의 작은 구멍을 막습니다. 그리고나서 차호를 기울여 차호의 출수구로 물이 흐르거나 뚜껑과 차호의 틈으로 물이 흐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를 절수(絶水)시험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절수가 제대로 된 차호인데, 절수가 제대로 되는 차호여야만 차를 우릴 때 차의 향기가 제대로 응어리져 차향이 잘 보존되며 또한 차탕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차를 우릴 때 열상을 입을 염려가 없습니다.

물론 절수가 제대로 안되는 차호라도 세라믹 연마제 등을 이용하거나 뚜껑을 시계방향으로 계속 돌려서 차호와 마찰시키는 방법으로써 차호와 차뚜껑을 조심스럽게 잘 갈아서 절수가 되게 할 수 있으나, 수공으로 만든 비싼 차호는 이렇게 갈아내는 것을 금기로 여기므로, 미리 확실하게 검사를 해야 합니다.

나. 물을 따를 때 물은 반드시 똑바로 부드럽게 물길이 꼬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잘 흘러야 합니다. 이런 것을 시험하는 것을 '출수'(出水)나 토수(吐水)시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차호의 선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다. 차호에서 뚜껑을 빼고 차호를 탁자 등 평평한 곳에 올려놓았을 때, 차호의 입구(호구, 壺口)보다 차취(茶嘴, 차호의 부리 즉 차호의 출수구)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야 합니다. 만약 호취가 호구보다 높으면, 차를 따를 때 차가 호구로 넘칠 수 있고, 거꾸로 호취가 호구보다 낮으면 찻물이 차호에 가득 찰 수가 없어서 물이 차기도 전에 호구로 흘러 나올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경우는 좋은 차호라고 볼 수 없습니다.

라. 차호의 겉모습이 깨끗하고 완전해서 마치 거울처럼 깔끔한 것이 좋습니다. 아울러 차호의 안쪽도 깨끗해서 흙냄새나 쇠냄새 및 다른 이물질의 냄새가 없어야 합니다. 또 더러운 색상이 남아있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마. 차호를 손에 잡고 차호의 뚜껑을 벗겨서 그것으로 호구를 가볍게 문질러보면 쟁쟁거리면서 높고 맑은 금속성의 소리가 나야 합니다. 이것은 차호의 재질이 그만큼 좋다는 것을 뜻하며, 또 제대로 된 온도에서 구워냈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자사광의 풍화처리나 열처리가 잘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고 저음의 둔탁한 소리가 나거나 지나치게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 좋은 차호라고 볼 수 없습니다.

바. 차호에 물을 가득 부어서 손으로 들어보아야 하는데, 이때 제대로 된 차호는 중심이 잘 잡히지만, 그렇지 않은 차호는 한쪽으로 무게가 기울게 됩니다.

사. 공장제 차호와 물레를 이용한 수공차호 및 순수공차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시간이 지나서 실물을 보면서 구분하는 것이 좋으며, 일단은 공장제 차호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값이 싼 차호 가운데 수공차호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밖에도 몇가지 주의사항이 있지만, 이 정도만 숙지하시면 자사차호를 선택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5. 새로 구입한 차호의 처리법

차호는 그 어떤 것이든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기 때문에 가끔 이상한 맛과 냄새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칭해서 불기운이라고 표현하기도 헙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대로 두고 차를 우려내면 차맛과 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먼저 아고(牙膏)나 그릇 씻는 세척제 등을 사용해서 차호의 안팎을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일반 수세미를 써도 되지만 차호 전용세척도구를 쓰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런 전용세척도구는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부드러운 헝겊 행주로 씻으면 됩니다. 다만 괴상한 냄새가 나는 헝겊 등이나 화학세제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으로 씻어낸 차호는 뚜껑을 벗겨서 함께 상온의 물에 넣어 끓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이 끓기 시작하면 5~10분 정도를 더 끓인 다음, 불을 끄면 되는데, 이때 물이 끓으면서 차호와 뚜껑이 서로 부딛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부딛치면 파손의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강제로 식히지 말고 잘 건져서 저절로 마르면, 그때부터 차호를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 처리한 차호를 바로 차를 우리는 데 쓰지 않고 한참동안 우려낸 찻물을 담는 공도배(公道杯)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일정한 찻물이 제대로 들면 더욱 좋은 차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호는 차의 향기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같은 차나 비슷한 차를 우리는 데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묻고 답하기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6. 어떻게 양호를 시킬 것인가

차호를 처음 쓸 때는 그 표면의 빛깔이 맑거나 윤기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유약을 써서 만들었거나 인공적 연마제로 거울처럼 다듬었을 경우, 윤기가 나기도 하지만, 차호는 오래 잘 쓸수록 그 빛갈이 윤택해집니다. 또 훨신 단단해집니다. 이렇게 하는 관리법을 양호법이라고 합니다.

양호가 되려면 일단 비슷하거나 같은 차종의 향기 등이 차호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차호의 미세한 공기구멍이 잘 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차호를 제대로 씻어서 말려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차를 우리면서 차호의 안팎을 늘 같은 온도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차를 우리면서 차호의 밖에도 뜨거운 물을 부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차호의 내벽과 외벽의 온도가 비슷해야 차호는 숨을 제대로 쉽니다.

또 차호의 사용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깨끗하게 뜨거운 물로 씻어두어야 합니다. 갑자기 찬물로 씻을 경우, 차호의 기공이 닫히거나 막힐 수 있습니다. 내외를 깨끗하게 앃은 다음, 안쪽은 저절로 마르게 하고, 바같쪽은 양호건(養壺巾) 등으로 가볍게 닦아서 그늘에서 보관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다가 끝에서 대충 줄이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핵심체크 가운데 차호 부분은 여기서 줄입니다.

다음에는 자사차호를 제외한 여러 차구와 그 재질에 대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Chinese Tea Ceremony

Japanese Tea Ceremony

일본 다도 (남자)

일본 다도

중국 다예

Tea and Health

생로병사의 비밀 - 차

선차 다담

궁중 다례

차 우리기

“60도씨의 물로 우려낸 찻물에 들어있는 유효성분은 100도씨의 그것에 비하여 45~65%밖에 되지 않는다.”(<중국다경>, 상해문화출판사, 1995년판, 585쪽)

위의 말은 여태껏 제가 차를 함께 마시거나 권하면서 마르고 닿도록 자주 했던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차계에 만연해 있는 ‘70도씨 이하 식힌 물로 차를 우려내는 표준(?) 차 우리기’로는 제가 만든 덖어서 익히고(초청살청(炒靑殺靑) 덖어서 말린(초청건조(炒靑乾燥)) 차의 향미는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새로운 포다법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우려내는 찻그릇의 용적 대비 2% 중량의 차를 100도씨 물로 5분 동안 우려내는’ 포다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 포다법은 음다(飮茶)를 위한 것이 아니라 품다(品茶; 차의 품질감정. 심평(審評)이라고도 함)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포다법으로 우려낸 찻물은 잘 훈련된 평다사(評茶士)가 그 차의 장단점을 효율적으로 가려내기에 적합할 뿐이지, 맛있게 마시기에는 비교적 농도가 짙는 편입니다.

차의 오미(五味; 신(辛), 산(酸), 고(苦), 삽(澁), 감(甘))와 사기(四奇; 색(色), 향(香), 미(味), 기(氣))는 다류(茶類; 녹차, 홍차, 청차, 백차, 흑차, 황차 등)와 성상(成狀; 잎차, 덩이차, 가루차 등) 그리고 등급(等級) 등에 따라 그 특성(特性)과 우열(優劣)이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어떤 차의 장점을 북돋우고 단점을 감싸려면 천편일률(千篇一律)의 포다법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1. 백인백색(百人百色)이듯, 어떤 차에는 그 차에 꼭 맞는 포다법(泡茶法; 차 우리는 방법)이 있다.
한 통 차에는 그 차 고유의 이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산지(産地)와 개별 다원(茶園)의 입지에 따라 표고, 지형, 토질, 방위, 온도, 습도, ... 등의 생육환경이 다르고, 그밖에도 품종, 재배 방식, 채취 시기 및 방식, 제다법, ... 등에 의하여 완성차의 품질이 결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완성차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미와 성질이 달라지고, 마시는 이의 기호와 상태에 따라서도 최적(最適)의 포다법은 달라져야 합니다.

2. 차 우리기의 세 요소(要素)
차 우리기의 세 요소는 차의 양과 물의 양의 비율, 물의 온도, 우려내는 시간입니다. 그밖에도 수질(水質), 그릇의 크기와 재질, 채광(採光), ... 등이 찻물의 향미에 영향을 미칩니다.

위의 세 요소를 잘 융합시켜야 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차의 양이 많거나 물의 온도가 높을수록 우려내는 시간은 짧게 합니다.

3. 차 우리기의 두 경향

다시 말해 차는 그 품성과 특성에 따라 양과 온도와 시간을 잘 결합시켜야 하는데, 이 세 요소의 비례 또는 반비례 관계가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차를 우리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얼르고 달래는 방식이 있고 다음으론 힘차게 뽑아내는 방식이 있습니다. 적고 낮고 짧은 것을 앞의 경향으로 많고 높고 긴 것을 뒤의 경향으로 우선 나누겠습니다.

4. 적용(適用)

차를 우릴 때에는 먼저 그 차의 품성과 특성을 잘 살펴야 하는데, 이 글에서는 차의 종류에 따른 생숙(生熟; 익은 정도)에 관하여 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차의 익은 정도는 발효도(醱酵度), 화입량(火入量), 숙성도(熟成度) 등에 의해 정해지는데, 그 정도가 높을수록 차의 향미는 순화감윤(醇和甘潤)하고 낮은 차는 신선상쾌(新鮮爽快)합니다. 때문에 발효차는 녹차에 비하여 높은 온도에서 우려내어야만 그 온화(溫和)한 향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녹차의 익히는 방식에는 찌기와 덖기가 있고, 말리는 방식은 초건(炒乾; 초청건조(炒靑乾燥)의 줄임말. 높은 온도로 덖어 말리기)과 홍건(烘乾; 홍청건조(烘靑乾燥)의 줄임말. 낮은 온도로 길게 말리기)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방식에 따라 화입량과 숙성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쪄서 익히고 열풍으로 말린 차는 반드시 낮은 온도에서 우려내어야 덜 익은 고삽미(苦澁味)를 피할 수 있습니다.

같은 오룡차 가운데서도 발효정도가 낮은 대만포종(臺灣包種)이나 청향(淸香)을 살려 만든 오룡차는 신선청쾌(新鮮淸快)한 향미가 자랑입니다. 때문에 양은 늘리고 온도를 약간 낮추어서 짧게 우려내어 그 장점을 살려내어야 합니다.

백차와 황차는 같은 약발효(弱醱酵; 발효도가 10~30% 안팎) 차에 속하지만 그 제법이 서로 다릅니다. 즉, 백차는 익히기 전의 시들리기(위조(萎凋))를 주로 하여 만들고, 황차는 가볍게 익히고 비비고 말린 뒤에 가볍게 띄우기(민황(悶黃); 흑차의 쌓아 띄우기(악퇴(渥堆))에 비하여 경미한 후발효 공정)를 하여 만듭니다. 백차의 청량(淸凉)한 느낌을 살리려면 양을 줄여서 길게 우려내어야 하며, 황차는 중발효 청차(中醱酵 靑茶; 발효도 30~40% 안팎인 오룡차)인 무이암차나 철관음 등에 준하여 우려내어야만 그 온화(溫和)한 기운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발효 청차(重醱酵 靑茶; 발효도가 60% 안팎인 오룡차)인 대만오룡(백호오룡, 동방미인, 병풍차 등으로 부름)이나 봉황수선은 더욱 뜨겁고 길게 우려내어야 합니다.

홍차나 흑차는 둘 다 강발효차(强醱酵茶; 발효도가 70% 이상인 차)에 속하나, 홍차는 전발효(前醱酵; 차잎을 익히기 전에 비벼서 발효시키는 공정) 차이고, 흑차는 차잎을 익히고 비벼서 말린 뒤에 두껍게 쌓아서 후발효(後醱酵; 미생물에 의한)시키거나 쪄서 덩이지은 다음 오래도록 쌓아두어 묵힌 차입니다. 때문에 홍차는 적은 량을 길게 우려내어야 그 농염(濃艶)함을 잘 드러나고, 흑차는 작은 그릇에 많은 양을 넣고 연거푸 짙게 우려내어야 그 잘 익은 부드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흑차 가운데 보이차(普洱茶)의 경우, 진기(陳期)가 오래된 차일수록 잘 숙성되어 작은 그릇으로 짙게 우려내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숙보이청병(未熟普洱靑餠; 여기서의 청병은 쇄청녹차(曬靑綠茶)를 악퇴(渥堆; 쌓아 띄우기)하지 아니하고 둥근 시루떡 모양으로 뭉쳐 만든 운남산(産) 덩이차(긴압차(緊壓茶), 괴차(塊茶) 등으로 부름)를 이르며, 미숙(未熟)하다는 것은 진기(陳期; 묵힌 기간)가 오래되지 않아 후발효가 충분치 않은 상태를 가르킴)은 생랭(生冷)한 성질(야생성(野生性)?)이 강하므로 큰 주전자에 끓여서 마시거나 소젖이나 양젖에 타서 마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치면서...

이제까지 육대다류(六大茶類; 녹차(綠茶), 백차(白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홍차(紅茶), 흑차(黑茶))를 생숙(生熟)의 정도에 따라 제대로 우려내는 방법을 짚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차 생활에 있어서는 같은 종류의 같은 성상의 같은 등급의 차라고 하더라도 그 품질과 특성과 우열이 다릅니다. 비료기가 많은 차는 무겁고, 제 때에 따지 않은 차는 텁텁하며, 제대로 익히지 못한 차는 어지럽고, 제대로 비비지 못한 차는 싱거우며, 제대로 말리지 못한 차는 거슬립니다. 세심히 살피고 정성껏 달래어서 맑고 상쾌하며 부드럽고 깊으면서도 짙은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향기롭고 멋스러운 차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차맛어때 원문보기 글쓴이 : 春樹

차마고도 - 생명의 차

차란 무엇인가? - 오상룡





Gongfu Puerh Tea

Intro to Puerh Tea

보이차 사는 요령

실수하지 않고 보이차 사는 법

최근 몇년 사이 보이차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에 뛰어들고 있다. 원래부터 보이차를 생산하던 기업들은 설비 규모를 키우고 매출을 늘리고 상표의 지명도를 높이기를 희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에 뛰어들어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나쁜일은 아니지만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정보와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소비자들이 보이차를 좋아하게 되면 당장에 진짜 오래되고 좋은 보이차를 사서 마시고 싶어 하는데 오래된 명차를 찾기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좋은 녹차나 오룡차를 사는것과 보이차를 사는 것을 비교해보면 보이차는 생차와 숙차, 건창및 습창, 야생차와 일반 차원차, 생산년도 등 여러가지를 알고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간단치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차를 고르는 원칙은 같기 때문에 고르기 전에 우선 많이 보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마시고 품평하여 차의 성질과 관련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책에서 소개한 내용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보이차 시장의 병화와 술수는 무궁하기 때문에 책에서 본 단편적인 지식에 너무 의존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 보이차를 살때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

1. 귀로 사지 말아야 한다.

오래된 명품 보이차는 그리 많지 않고 정보가 투명하게 잘 공개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보이차의 문화나 역사 등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많은것을 틈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일어난다. 보이차를 파는 사람들의 화려한 입담에 주의해야 하고 특히 삼십년, 사십년, 오십년 등 연도를 강조하는 말에는 조심해야 한다. 수십년 묵은 차는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만일 정말 오래된 차를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우선 보관조건을 살피고 마셔보았을 때 입에서 느껴지는 느낌 등을 차분하게 판단해야 한다. 시장에는 기술을 부려 오래된 차처럼 보이게 만든 차들이 많이 있다.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차를 파는 사람을 가볍게 믿고 이런 개조차를 산다면 속임당하여 경제적으로 손해보는것에 그치지 않고 겨우에 따라서는 건강을 위협할수도 있다.

2. 우선 마셔봐야 한다.

차의 쓰임새는 마시는 것이고 차를 사는 것은 마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차를 살때는 우선 마셔보아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찻집에서는 보이차를 사기 전에 마셔 볼수 있게 한다. 만약에 시음을 거절한다면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오는 것이 현명하다. 차를 마셔봤을때 몸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북하면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사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차의 품질이 꼭 나쁘다고 할수는 없지만 자기의 취향에 적합한 차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차를 살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자기의 입맛과 자기의 몸에 맞느냐는 것이다. 물론 마셔보고 산다는 것을 말하기는 아주 쉽지만 차를 살 때는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될 요인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쉽지는 않다.

차를 시음할때 스스로 느끼기에는 곰팡이 맛과 냄새인데 차를 파는 사람의 설명이 이것이 오래되고 묵은 차의 특징이라고 하면 경험과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을 믿기 쉽다. 또하나의 문제는 차를 파는 사람들은 차의 농도, 물의 온도, 넣은 차의 양 등을 잘 조절하여 그 차의 결점을 감추고 좋은 점을 살리는 기교를 부린다. 이런 경우는 자기 스스로 차를 우렸을 때도 여전한 풍미를 가지고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시 고려해 봐야 된다.

보이차를 구매할때는 지나친 환상을 버리고 차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차에 대한 경험이 충분하지 않으며 요구하는 차의 수준이 높으면 위험이 크고 낭패하기 쉽다. 보이차를 다른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마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저런 소리를 듣지말고 자기의 입맛과 몸에 맞는 보이차를 고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보이차 구매요령

많이 보고 많이 마셔보고 공부하고 관련지식을 쌓는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외 몇가지를 요령을 알아보자. 신뢰할 만한 찻집을 찾는다. 어떤 찻집이 신뢰할만한가? 찻집 주인과 교류하면서 자기가 궁금한 것들에 대하여 질문하였을때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먼저 살펴라. 만약 대답이 불충분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자기가 팔고 있는 차만 좋은 차로 선전한다면 믿을만한 찻집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보이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관련된 책도 읽고 공부하여 어느정도의 기초지식을 갖춰야 한다. 어느 정도 기초가 갖춰지면 찻집에 가서 조금씩 시험해 보는 것이 좋다. 마땅한 차를 찾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찻집에 가서 자리를 잡고 차를 시음하면서 주인과 대화를 해본다. 주인이 보이차에 대한 이해가 깊고 책이나 다른곳에서 얻지 못한 것들을 잘 설명하면서도 합리적이고 기본적인 원칙에 합당하다면 소량의 차를 사서 이것을 집에서 시음해 본다.

이런 방법으로 몇번 거치면서 여러집을 돌아다녀보면 보이차를 파는 찻집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판단이 선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이렇게 하여 신뢰할만한 찻집이 정해지면 비로소 자기가 마음먹은 차를 구매한다. 이때 여러 종류의 병차, 전차, 타차 중에서 어떤 차를 사야할까? 당연히 가장 전통적인 차를 사는것이 좋다.

전통적인 보이차는 윈난 대엽종 차나무에서 딴 찻잎을 쇄청 방법으로 가공한 생차나 숙차로 만든 산차나 긴압차이다. 이런 정의에 맞는 차의 특성을 마음에 두고 잘 살펴 차를 사야지 일부 차상들이 하는 언변에 현혹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보이차가 아닌 차를 살수도 있다.

보통 생차나 숙차 그리고 병차나 전차, 타차 등 모두 각기 그 특징이 있다. 충분히 마셔보고 자기의 몸과 입에 맞는 차를 골라야 한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생차나 숙차의 원료는 같다. 다만 그 발효 공정이 다르다. 숙차는 악퇴 공정을 거쳐 바로 순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탕색은 붉은 색을 띤다. 생차는 맑고 신선하며 활성이 있으나 쓰고 떫은 맛이 남아 있으며 탕색은 황색이다.

순하고 부드러운 차가 몸에 맞는다면 우선 숙차를 마셔본다. 생차는 아무래도 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당장 입에 꼭 맞는 차보다는 기운이 좋으면서 어느 정도 깊고 조화로운 맛이 있는 생차를 골라 보관하면 천천히 그 변화를 느낄수 있다. 우선 기본적인 품질이 확보되는 원하는 차를 골랐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확인해 본다.

1. 냄새를 맡아본다.

차는 냄새를 잘 흡수한다.

송나라 시대의 채양이 말하기를 "차는 조릿대를 좋아하고 향약을 꺼린다"고 했고 명대의 문룡은 "차는 깨끗하고 시원한 것을 좋아하고 찌는 듯한 더위를 싫어하며 맑고 정리된 곳을 좋아하고 냄새나는 곳을 꺼린다" 라고 했다. 잘 만든 차라도 적절하게 보관하지 못하면 차의 진향이 아닌 다른 냄새가 날수가 있다. 생차나 숙차 모두 보관방법은 같다.

2. 표면을 잘 살펴본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차를 골랐다면 덥석 사지말고 포장 상태부터 면밀하게 다시 살핀다. 보이차의 포장은 대부분 전통적인 방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병차의 경우는 매 편 마다 면지를 사용하여 한편 한편 포장하고 일곱 편을 한통으로 하여 죽순 껍질로 포장하고 죽순 껍질로 포장한 것을 마끈이나 대나무 쪼갠것이나 철사로 둘러 묶는다. 타차는 일반적으로 우피지로 한통을 포장하여 그 것을 대를 쪼갠것이나 조릿대 쪼갠것등으로 묶는다. 차를 고를때 우선 눈으로 보아서 포장이 오염되지 않고 단단한지, 풀었다가 다시 포장하지 않고 원래의 포장 그대로인지, 년도 생산 차창 등의 내용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등을 확인한다. 포장을 살펴봤으면 다음으로 차 자체의 특징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분쇄하여 만든 차는 등급이 낮은 차라고 할수 있고 찻잎 하나하나가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눌려져 덩어리로 된 차라야 한다.

다음은 찻잎의 쇠고 여림을 살핀다.

보통 여린잎이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포장에 소개하는 것과 일치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 차의 모양을 살핀 후에는 차의 색깔을 본다. 다음에 차의 면에 숨을 후 하고 불고 나서 바로 깊게 들이 쉬면서 냄새를 맡는다. 만약 산차라면 손에 조금 쥐고 냄새를 맡아본다.

좋은 차는 색이 맑고 윤이 나 보기에도 좋고, 이물질이나 잡물이 섞이지 않아 향을 맡아보면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질이 좋은 산차는 갈홍색으로 윤이 나고 찻잎은 튼실하고 부서진 것이 적어야 하며 한약 냄새 비슷한 특유의 향이 있다. 반대로 질이 낮은 차는 색이 어둡고 광택이 없으며 부서진 것이 많다. 좋은 차라면 당연히 흰 반점이나 곰팡이 흔적 등 의심스러운 점이 없어야하고 차의 면 전체의 맛이 균일해야 한다.

차의 외면을 살펴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나중에 차를 우려서 확인한다. 눈으로만 정확하게 판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오래된 차 중에는 죽순껍질로 포장한 포장이 부서져 있기도 하고 외포장지에 좀이 쓸기도 한다.

오래 보관된 차는 묵은 기운이 매우 강하여 마시기 전에 꺼내서 바람을 쏘이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을 '차를 깨운다'라고 한다.

3. 차를 우려 마시고 향을 확인한다.

냄새를 맡아보고 외형을 자세히 살핀 다음단계는 우려서 마셔보는 것이다. 속설에 귀로 듣는 것은 빈틈이 많고 눈으로 봐야 실속이 있다는 말이 있따. 그러나 차를 살 때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려 마셔봐야 한다.

눈으로 보았을때 결점이 없고 좋아 보여도 우려 마셔보면 바로 문제점이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차의 향기는 차의 품종, 제다기술, 보관연도에 따라 다르다. 흔히 말하기를 우수한 품질의 제대로 보관된 차를 우리면 그 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한다. 이런 차를 우리면 그 향이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예를 들면 계원향, 빈랑향, 화향, 달콤한 향등이 여기에 속한다. 만일 습창차나 보관이 잘못된차, 원래 차의 품질이 떨어지는 차를 우리면 바로 곰팡이 같은 냄새가 난다.

어떤 사람들이 곰팡이 냄새가 오래된 차의 특징이라고 하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곰팡이 맛은 변질된 맛으로 사람을 불편하고 거북하게 하는 것이고 오래된 묵은 차의 맛과 향기는 오랜 기간 산화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내는 맛과 향기가 있다. 이향은 사람을 유쾌하게 한다. 향이 매우 미미하나 그 향이 자극적이며 거북하면 그 차는 사지 않는 것이 좋다.

차를 우려 뜨거울때 냄새를 판단하는것은 물론 식은 다음 향을 맡는다. 좋은 보이차는 식은 다음에도 그 향이 두고두고 사람을 파고들어 유혹한다. 그러나 질이 떨어지는 보이차라면 향이 없어지거나 있다해도 순수하지 않고 시거나 쉰 듯한 냄새나 곰팡이 냄새가 난다.

4. 탕색을 본다.

좋은 보이차는 생차, 숙차 모두 탕색이 맑고 투명하다. 좋은 숙차의 경우 탕색이 붉고 진하며 맑다. 붉은 포도주 같이 붉고 진하며 투명한 것이 상등 보이차의 특징이다. 짙은 붉은 색도 정상이다. 어떤 숙차는 간장처럼 검은 색이 나는데 자세히 보면 차가 탁하고 맑지 않다. 이런 차는 구매할 가치가 없는 차이다.

생차는 보관기간이 오래된 정도에 따라 처음의 연한 황색에서 점점 맑은 붉은 빛을 나타낸다. 색이 진해지는 것은 좋지만 탁하다면 좋은 차는 아니다.

5. 맛을 음미한다.

보이차의 맛을 평가할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특유의 순수하고 조화로우며 깊고 매끄러우며 상쾌하면서도 뒷맛이 단 것이다. 여기서 순수하고 조화로우며 깊은맛이라는 것은 잡맛이 섞이지 않은 차의 순정한 맛과 풍부한맛이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내는 깊은 맛을 말한다.

'매끄럽다'는 것은 차를 마셨을때 입안에서 목에서 느끼는 느낌이 부드럽고 감싸듯이 내려가는것을 말하며 떫고 걸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상쾌하다'는 것은 차를 마셨을때 느껴지는 개운하고 상쾌한 느낌을 말한다. 좋은 보이차를 마시면 매끄럽고 상쾌한 느낌을 받는데 매끄럽게 목을 넘어가면서 촉촉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 있다.

'뒷맛이 달다'는 차를 마시고 난 뒤에 잎과 혀에서 단맛이 느껴지며 침이 고이는 것을 말한다. 좋은 보이차는 매끄럽고, 부드럽고, 촉촉하며, 뒷맛이 달고 단침이 고인다. 만일 생차라면 보통 마실때는 약하게 쓰고 떫은맛이 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혀와 입안에서 단맛으로 변한다. 이것을 '뒷맛이 달다'라고 한다.

뒷맛이 오래가면서 강할수록 좋은 차이다. 질이 낮거나 변질된 보이차의 맛은 이런 표현을 쓴다. 맛이 옅고 매끄럽지 않으며 달게 느껴지는 뒷맛이 없으며 혀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거북하며 심지어는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차는 마시면 매우 떫은맛이 나며 입과 목이 마르는 느낌이 있으며 거북하면서 긴장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또 어떤 종류의 차는 얼얼하고 걸리고 찌르고 변질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차들은 차의 제다과정이나 보관이나 운반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건강에도 무익하니 피해야 한다.

후루법: 차를 맛볼때는 급하게 목으로 넘기지 말고 '오'소리를 내는것 같이 입술을 둥글게 하고 잔을 아래 입술에 댄다. 윗입술을 잔에 있는 차에 직접 대지 말고 조금 빨아들여 마신다. 사레들리지 않게 천천히 조금 마신다. 고개를 들고 차를 머금고 숨을 입으로 들이 쉬면 '후룩' 소리가 나는데 이때 입안에 든 차가 공기와 같이 선회하면서 입 구석구석까지 접촉한다. 차분하고 자세히 음미한다. 이렇게 하면 차맛이 순수하고 조화로우며 깊은지를 잘 알수 있으며 뒷맛도 잘 분간할수 있다.

6. 차를 마신 후에 그 남는 엽저를 살핀다.

엽저는 차를 다 우려내고 남은 찻잎을 말한다. 엽저를 볼때는 그 색과 광택, 유연도 그리고 잎이 부스러지지 않고 완전한가를 살핀다. 좋은 보이차의 엽저는 갈홍색이고 잎 전체가 고르게 윤이 나고 반점이 거의 없으며 잎 전체가 완전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으며 만져보면 부드러우며 탄력이 있다. 검은 빛을 띤 갈색이나 종갈색도 정상에 속한다.

질이 낮은 보이차의 엽저는 검은 빛을 띠고 윤기가 없으며 균일하지 않고 얼룩덜룩하고 만져보면 탄력이 없다. 어떤 경우는 만져보면 바로 문드러지고 오래 우려도 잎이 펴지지 않으며 잎이 부패하거나 경화한 흔적이 있다. 이런것은 모두 질이 낮은 보이차의 엽저에서 볼수 있는 현상이다. 엽저를 살필때 또 한가지 살펴야 할것은 긴압차의 경우 차의 표면과 이면, 즉 차의 겉과 속이 균일한지 여부이다. 등급이 높고 질이 좋은 차를 겉으로 나오게 하고 속에는 질이 떨어진 차를 넣는 경우도 있다.

- 오래된 차에 접근하는 방법 -

보이차를 즐겨 마시는 차인이라면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 예를 들면 숙차의 경우는 어느 차창에서 만든것을 선호하고, 생차의 경우는 무슨 상표를 선택한다는 등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수준의 차창들의 차는 품질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차의 품질은 차를 생산한 해의 기후조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후조건이 최적이었을때 가장 좋은 차의 원료가 나오고 기후조건이 불리했을때는 아무래도 그만큼은 못하는 원료가 나오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품질을 보증할 만하다. 보이차를 소장 보관하는 일을 새로 시작하는 차인들은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적당한 신차를 고른다.

새로 만든 차는 그 성질이 매우 강렬하여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실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의 성질과 맛이 부드러우며 편하게 마실정도까지 발효되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악퇴기술을 이용한 숙차가 생겼다. 숙차는 쇄청모차를 인공적으로 조건을 맞춰서 빠른 시간 안에 맛과 성질이 순하고 부드러우며 탕색이 진한 붉은 색 차로 만든것이다. 악퇴공정을 거쳐서 만든 숙차는 경제적으로 편하게 순하고 부드러운 차를 마실수 있게는 하지만 사람이 인공적으로 단 시간에 만든 것은 세월과 자연이 만들어낸 자연스럽고 깊고 풍부한 아름다움을 당할수는 없다. 사실 좋은 원료로 만든 생차를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익어서 내는 깊고 풍부한 맛이 보이차의 정수이다.

보이차는자연과 사람이 길고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낸 보물이다. 생차가 충분히 익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에 따른 변화는 차의 등급, 보관상태 등 수많은 변수들이 있어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래된 차에 대한 선망이 속임을 당하는 빌미가 된다.

먼저 보이차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상당한 수준까지 쌓은 다음에 오래된 차에 접근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이다. 이 단계에서 유명한 차창의 대표적인 차, 그러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차부터 사서 일부는 마시고 일부는 보관해가면서 그 변화를 느끼고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공부해가며 차츰 연대가 오래된 차로 옮겨가는 것이다. 물론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차의 등급결 특징, 생차와 숙차의 차이, 보관조건에 따른 차이, 보관기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변화는 경향 등에 익숙해진 연후에 연도가 5~10년 정도된 차부터 구매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정도 연도의 차지만 달고 순정하며 탕색은 맑고 투명하고 가격도 그리 비싸진 않다. 일상생활 중에는 생차와 숙차를 같이 마시며 각각의 특색이 익숙해지면서 인연이 닿아 오래된 좋은 차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섬세하게 맛보며 그 특징을 기억하면서 스스로의 실력을 연마해 가도 늦지 않다.

보이차의 포장 - 병차

칠자병차의 포장방법은 옛날의 원차 포장방법을 이어오고 있다. 차 한편 한편을 종이로 싼 다음 일곱편을 죽순껍질로 포장하여 한통을 만들고 열두 통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 한광을 만들고 두 광을 말이나 노새의 등 양쪽에 싣는다. 현재는 이미 차를 말에 실어 운반하지 않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넣어 한광씩 포장하는 방법이 이어져 오고 있다. 보통 차창에서는 12통을 담은 짐 광주리에 한장의 차창의 이름 상품표시 등이 쓰인 큰 전표를 붙이는데 이것을 소위 마이토우(맥두:광둥지방의 방언으로 상표, 전표 등을 의미한다)라 부른다.

보이차계에서 흔히 말하는 '7542', '8852' 등의 상품 배합 표시가 마이토우 상에 기재되어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맥호'라 한다. 마이토우에는 '7542'등의 맥호와 그 옆에 '902', '301' 같은 수자가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1999년 2차 생산분, 2003년 1차 생산분이라는 표시이다.

일반 소비자들이 볼수 있는것은 일곱 편이 든 한통 한통의 포장으로 대 광주리에서 꺼내진 것이다. 매 편마다 포장지 안에는 내비와 내표가 있어 구별할수 있는 근거가 되며 내표는 설명서 역할도 한다. 내표는 포장지와 차 사이에 넣는다. 내표는 크기가 크고, 포장지가 얇은 경우는 포장지 밖에서 어렴풋이 그 유무가 확인된다. 내비는 차를 눌러 만들때 차 속에 집어 넣어 만들기 때문에 차의 면 위에는 내비의 일부분만 보인다.

보이차의 포장 - 타차

타차의 전통적인 포장은 7개의 타차를 죽순껍질로 길게 포장한다. 현재 차창에서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포장하는데 우피지를 이용하기도 하고 둥근 종이통에 넣기도 한다. 이런 여러 방법 중에서 우피지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타차를 낱개로 포장할때는 줄무늬 우피지나 면지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타차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내비만 넣고 내표는 없는 경우가 많으며 내비도 윗면에 넣어 만들기도 하고 어떤 차창에서는 내비를 타차의 오목한 곳에 넣기도 한다.

보이차의 포장 - 전차

전통적인 전차의 포장으니 한개 한개의 차를 우피지나 갱지로 포장한다. 또는 죽순껍질을 이용하여 포장하기도 한다. 차에 내비를 넣기도 하고 넣지 않는 것도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참고- 보이차/한솜미디어

보이차의 명현 현상

□ 명현현상이란 무엇인가요?

명현현상이란 몸이 호전됨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반응을 말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잠복되어 있던 병이나, 이미 앓았던 병이 몸이 호전됨에 따라 그 증세가 새롭게 나타나거나 다시 나타는 것을 말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몸이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보며, 서구의 의학계에서는 이것을 "치유의 위기"(crisis for healing)라고 부릅니다.

진정 보이차를 꾸준히 상복하는 경우, 짧게는 2-3일, 길게는 한달 안에 이와 같은 명현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사람의 체질과 몸의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몇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명현현상은 몸에 있는 독소(毒素)가 빠지면서 생기는 여러 몸의 반응들입니다. 몸의 독소가 얼마나 있으며, 어느 장부를 중심으로 있는가에 따라 그 반응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설사․배앓이

경미한 독기가 빠질 때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사나 배앓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부의 냉기(冷氣)가 풀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일반적인 설사와 같은 무력감이 없고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며 몸이 가벼워집니다.

속이 울렁거릴 때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은 위가 좋지 않은 경우(구체적으로 냉한경우), 간이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위가 무기력하거나 허약한 경우가 많으며, 이럴 때 보이차를 드시면 울렁거림이 심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상이 심해서 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발효도가 약한 생차를 너무 진하게 드셨거나 과한 양을 드신 경우에 간혹 있으며 복부에 냉기가 심하게 정체되어 있었던 경우에도 종종 나타납니다.

변비

차를 드신지 조금 지나면 모공이 열리면서, 일시적으로 변비 현상이 올 수도 있는데, 이것은 대장으로 가야할 물기가 피부를 통해 빠져나가며 생기는 현상으로 폐가 평소 좋지 않으셨던 분들에게서 흔히 나타납니다.

이런 반응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곧 사라지게 되며, 이처럼 보이차를 드시고 변비 현상이 오실 경우, 설탕을 보이차에 타서 드시고, 수분 섭취량을 평소보다 늘려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피부의 발진․여드름

채내의 독기가 피부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몸 전체나 일부에서 두드러기와 같은 작은 발진들이나 여드름같이 큰 발진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머리에서 비듬이나 진득한 피부벗겨짐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약을 복용하시기 보다는,

1. 드시는 차의 양을 좀 더 늘리거나,
2. 반신욕이나 족탕 등 신체대사를 높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렵더라도 긁지 마시고 정 참기 어려우시면 손으로 두드려 주시면 됩니다.

아토피성 피부염이 있을 경우

아토피성 피부를 비롯한 일반적인 피부불편증상은 열을 소화해야 하는 피부 부근의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피부 구멍이 막혀있거나 피부에 이르는 혈관계 및 신경관계가 일상적이지 못할 때, 각각 그 특성대로 피부는 불편한 증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차, 특히 발효차는 피부의 그런 상황을 일정하게 개선시킵니다. 즉 땀의 배출을 원활하게 하여 열을 잘 조정하도록 도와주며, 피부의 구멍을 잘 열어주어 분비물이 피부 중간층에서 발열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차를 장복할 경우, 피부와 관계된 열림과 닫힘이 균형을 이루기 쉽습니다. 따라서 차를 통해 피부와 관련된, 특히 아토피성 피부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단 아토피의 경우 피부의 기능이 살아나면서 피부 중간층의 허열이 급격하게 빠져나오면서 일정기간 동안 발진이 심해지고 진물이 심하게 나오게 되는데 이때는 오히려 차의 복용량을 늘려주고 보이차를 끓여서 그물에 몸을 담그는 목욕법을 병행하면 됩니다.

피부 간지러움, 두드러기

일반적으로 발효차를 드실 경우, 땀이 나고 소변이 쉽게 나오지만, 이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간계통에 약점이 있는 분이거나 신경을 많이 쓰는 일에 종사하는 분이거나 방사선이나 전파에 많이 노출된 분일 경우, 발효차를 드시면 처음에는 땀이 나는 일상 증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곧 피부가 간지럽고 두드러기가 나는 증상을 보름 정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런 문제를 맡아 내부에서 곯고 있던 간이 활개를 피고 그런 문제를 외부로 표출시키면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런 분은 피부의 발열이 멈출 때까지 긁지 마시고 차를 장복하면 몸이 스스로를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가려우면 두드려서 그 가려움을 이길 뿐, 절대로 긁으시면 안됩니다. 그럴 경우 원 상태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됩니다.

피부가 건조해지거나 마른 땀이 날때

허파에 약점이 있는 분이거나 성욕이 지나친 분이거나 성적 에너지가 고일 틈이 없는 분일 경우, 방광과 신장의 균형상실로 말미암아 발효차를 드시면 거꾸로 마른 땀이 날 뿐, 상당 기간 동안(대략 2달 정도) 더 땀이 나지 않고 건조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꾸준히 차생활을 계속하면 곧 일상적으로 땀이 나는 증상을 겪게 됩니다.

두통

경우에 따라 일시적인 두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이차로 인해 몸속의 냉기가 풀리면서 그 냉기로 인해서 생겼던 허열(虛熱)이 빠져 나가면서 그 반응으로 오는 두통입니다. 냉기와 허열의 치우침에 따라 두통이 오는 부위와 그 증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차를 좀 더 마셔서 땀이 나기시작하면 곧 사라집니다. 땀이 잘 나지 않을 경우 족탕을 하거나 반신욕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눈 충혈, 눈꼽, 귀의 진물이 생기는 현상

간혹 눈이나 귀를 통해서 머리속의 허열이 빠져나오면서 눈이 빨개지거나 눈꼽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진물이 나오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그쪽의 귀 또한 붓거나 아프면서 진물이 나올수 있습니다.

조금 특수한 경우인데 예전에 직접적으로 머리 부위를 다쳤었거나 알게 모르게 풍(風)을 통해 뇌신경이 손상되었던 경우에 머리속에 있던 신경성 허열이 직접 신경을 타고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손상 되었던 뇌 부위에 심한 통증을 동반하면서 반대쪽 손발이 저리거나 붓게 되는데 걱정할 것 없이 차를 더 드시면 허열이 다 풀리면서 가라앉게 됩니다.

팔다리/손발에 찬기운을 느낄 때

몸에 냉이 많으신 경우, 냉기가 빠질 때 팔다리나 손발이 찬기운이 부는 듯한 느낌을 가지실 수 있는데, 이는 몸 안의 냉이 손발로 빠질 때 생기는 1차적인 반응입니다. 관절에 냉이 아주 심하셨던 분인 경우 손, 발끝이 짓무르며 진물이 빠져나오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피부가 일시적으로 벗겨지거나, 부스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피부의 죽은 부분이 각질화되어 떨어져 나가는 경우입니다.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이 있을 경우

혈압과 당뇨는 모두 대사기능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보이차를 처음 드실 경우 대사기능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가벼운 울렁거림(메슥거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증상은 보이차를 더 마시면서 땀이 날 정도로 대사가 활성화 되면 금방 사라지게 됩니다.

보이차는 기본적으로 신장과 심장의 기능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고혈압이나 저혈압 환자 모두에게 혈압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힘이 있으며, 신장 기능을 활성화하여 당뇨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차를 많이 마셔서 몸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인병이 심하신 분은 전문가와 상의하여 몸 상태에 맞춰 차를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목마름 현상

뜨겁게 보이차를 드실 경우 일시적으로 목이 더 마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웬만한 분들이면 모두 느끼는 증상이므로 그다지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이차로 인해 대사가 활발해 지면서 몸속의 수분이 감소해 더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으로 목이 마른만큼 더 차를 마셔주면 되지만 번거로우실 때는 차를 미지근하게 식혀서 드시면 금방 가라앉습니다. 감기와 같이 온 몸이 발한증세를 보일 때도 이런 느낌이 더 강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보이차를 드시고 몸에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시는 경우는, 보이차를 충분히 드시지 않았거나, 몸의 감각이 상대적으로 둔감하신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반응이 아주 심하다고 판단되시면, 간이나 폐가 평소 좋지 않았나 살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간이나 폐가 좋지 않으셨다면, 보이차를 꾸준히 드신 후 한달이 넘어서 부터는 여러 명현현상이 나타나며, 이때부터는 전문가와 상의하시며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출처 :지유명차(대구차예관) 원문보기 글쓴이 : 銀毫

야생차 vs 재배차

일반적으로 보이차를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익숙한 것이 교목과 관목이라는 표현과, 그 중에서 특히 교목에서 채집한 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야생차라 하어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보이차를 고를 때 교목인지, 관목인지 구분하고 야생인지 아닌지를 구분지을려고 합니다. 사실 이 것은 관목의 경우 유기적인 성질이 교목보다 떨어 지고, 심지어는 몸에 좋지 않은 농약과 인공 퇴비등을 가하여 해당 연도 차잎의 생산량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현지 차 재배자의 인위적인 태도에 일침을 가하고자 하는 것으로 사용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목의 경우는 거의가 야생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현재 즐기는 야생차는 그 것이 인공적으로 재배를 한 다음 자연 상태에 방목하는 것이 대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래에 보시면 야생형을 야생형 야생차, 재배형 야생차, 방목형 야생차로 야생차를 구분해 두고, 차원차는 관목으로 인공적인 재배를 목적으로 하는 재배형 차나무로 구분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지 상인의 표현에 의하면 야생형 야생차는 그 차성이 강하여 차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고, 아래 번역물에서도 야생형 야생차는 그 강한 차성으로 인하여 일반인이 음용할 경우 설사를 유발할 수 도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배형 야생차도 야생형 야생차와 차성이 유사하다고 하며, 야생형 야생차를 일정 기간 재배하였다가 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 자신이 경영하는 차원에 방목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일부 차장에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장향나무등을 같이 심어 보이차에 장향이 깃들게 하기도 하고 기념병에 전문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야생차라고 하는 것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야생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중문 자료를 서툴게 나마 번역해 보았습니다.

야생형 야생차- 자연산 야생차

교목의 높이는 3M이상으로 변종된 차엽이 4~5종 정도로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여린 잎에는 융기가 없거나 적으며 침이 나타 나 있다. 3급 잎의 크기는 5~8cm, 다 성숙한 잎의 크기는 10~20cm까지 이른다. 잎의 껍질은 두텁고 넓어 유념 후에도 형태의 변화가 적고 모차의 색은 흑녹색을 띠며 잎맥이 비교적 분명하다.

차성이 강하고 무거워 향기가 깊고 특이하며 자극적인 맛이 적은 편이나 마신 뒤 느끼지는 맛은 단 편이다. 대 부분의 야생차청은 쓴 맛을 지니고 있는데 현지 소수민족은 야생형 차로 만든차를 쓰다고 하여 “고차(苦茶)”라고 부르기도 하며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 음용할 경우 설사를 부르기도 하여 음용에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재배형 야생차

관목과 교목위주이며 줄기는 여러 갈래로 뻗어 올라 가 나무 높이가 1.5~3m 정도이다.
인공적인 관리를 하는 까닭에 차엽의 변종이 적은 편으로 동일 지역의 차 재배지에서 2~3종의 변이종을 발견할 수 있다.

신선한 잎은 잎에 은모(银毫)가 많으며 잎맥은 가늘고 미세하다. 3급 차엽의 경우 잎의 크기는 3~5cm, 다 자란 잎의 경우에는 6~15cm정도에 이른다. 모차 색은 짙은 녹색이거나 황녹색을 가지며 잎의 수맥이 분명하고 뚜렷하다. 차성은 야생형 야생차와 비슷한 정도로 강하며 향기는 진한 편이다.

방목형 야생차

운남 차산 지역 대 부분의 쇄청모차는 방목형 차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차원에서 재배이후 인공적인 관리를 하나 인공비료나 농약을 주지 않고 퇴비나 건초 등을 비료로 사용한다. 차나무의 수령은 50~60년 이상이며 나무 높이는 1.5~2m정도이다. 잎은 두텁고 넓으며, 향기나 맛은 재배형 야생차와 재배형 차의 중간 정도이다.

차원차(茶园茶)

운남 현지의학자나 차업계 관계자는 차의 함유량이 높고, 제품으로 제작후 산화와 취합반응 기질이 비교적 빠른 것을 좋은 차라고 선호하고 있다. 현지 맹력해 대엽차로서 경곡대백차, 운항 10호, 운항 14호, 운선 9호, 운귀, 애평등을 재배형 보이차 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목차원에서 생산되며 잎은 두텁고 길며 은모가 많고 3급의 경우 2~3cm, 다 자란 것은 5~10cm 정도에 이른다. 모차는 짙은 녹색이나 황록색을 띄며 차성이 강한 편이다. 현재 운남학계에서 계속 품종을 개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