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31일 목요일

보이차 이야기 5

보이차의 수송길-다마고도(茶馬古道)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5

중국인들은 흔히 길을 가리켜 ‘마로(馬路)’ 즉 말이 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하긴 옛날 교통수단은 모두 말로 이루어졌으니 그러한 단어도 나올 법도 하다. 보이차의 운송도 이러한 ‘말길’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보이차의 운송길이 보이차가 뜨자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15년 전 운남대학 무치홍(木霽弘) 교수 일행은 최초로 이 길을 답사했다. 아니 차라리 탐험이라 말해야 옳은 듯싶다. 그들이 답사한 길은 운남에서 출발해 티베트까지 가는 산길이었는데, 너무나 장엄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험악하기도 했다. 어느 산길은 목숨을 내놓아야 비로소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있다고 한다.

이름조차 없던 이 길이 무치홍 교수에 의해 ‘다마고도(茶馬古道)’라 명명됐고, 불과 15년이란 짧은 세월 사이에 이젠 다마고도를 모르고선 차를 안다고 행세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보이차 운송 길 즉 다마고도는 6개가 있다고 한다. 이 길들은 대부분 청나라 때 보이차 상점들이 즐비한 이무(易武)에서 출발해 곤명(昆明)을 거쳐 북경으로 간다. 보이차를 조공하는 길을 가리켜 ‘보이관마대도(普이官馬大道)’라고 한다. 작년 필자와 중국운남공산당청년단은 120필의 말에 보이차를 가득 실어 이 길을 8개월간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실로 166년 만에 재현한 조공의 길이자 처음 시도했던 프로젝트였다.

다마고도 중 가장 험한 길은 역시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역시 이무에서 출발해 하관(下關)과 샹그리라(香格里拉)를 거쳐 티베트에 도착하는데, ‘보이관장다마대도(普이關藏茶馬大道)’라고 한다. 보이병차의 무게가 왜 편당이 357g이고, 왜 한 통이 7개여야 하며 왜 12통을 한 대바구니에 담아야 하는지의 의문은 모두 여기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티베트로 가는 보이차 운송 말은 사실 대부분 당나귀와 노새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체질이 강하고 거친 먹이를 잘 먹으며, 지구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말, 당나귀, 노새(이하 말로 지칭함)가 하루 걸 수 있는 길이 60km라고 한다. 이에 대부분 60km마다 하나의 마역(馬驛)이 있다고 한다. 말 한 필이 부담할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60kg이다. 즉 60kg의 화물을 지녀야 비로소 하루 60km를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헤아려 만들어진 것이 보이차의 무게 즉 357g이다. 357g×7편이면 한 통이 2.5kg이 된다. 2.5kg씩 12통이면 한 대광주리가 되는데, 이것이 30kg으로 말의 양쪽에 대광주리 각각 하나씩을 실으면 정확히 60kg이 된다. 이것이 보이차의 무게가 왜 357g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예로부터 보이차는 대부분 동남아로 수출됐다. 운남의 접경나라인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이 주 대상국이었다. 보이차는 이 나라들을 거쳐 태국, 홍콩, 마카오까지 이르렀다.

작년 ‘다마고도 북경조공 만리길’의 성공은 많은 상인들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참여의 동기는 순수했으나 결국 돈은 상인들이 벌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마고도를 통해 보이차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상인들에게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더 없이 좋은 돈벌이를 놓칠 리 없을 상인들이 흥행만 된다면 어느 길이든 어느 곳이든 보이차를 말에 실고 ‘다마고도의 재현’이라는 명분을 달고 상혼을 발휘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금년만 해도 운남에서 3개의 각기 다른 다마고도의 재현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흥행만 된다면 이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티베트를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로, 복건(福建)에서 바다 건너 타이완으로 그리고 북경과 북한을 건너 한국으로 온다는 계획도 있다고 한다. ‘다마수도(茶馬水道)’라는 명칭도 이제 멀지 않아 생길 것 같다.

보이차 이야기 4

보이차의 종류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4

“이곳의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이 마시는 차는 찻잎을 찐 후 덩어리 모양을 만든다. 그들은 이를 보차(普茶)라고 부른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의 <전략>에 기록된 글이다. 이 글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글로 보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수많은 보이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담겨져 있는 글로 보인다.

첫째, 여기서 말한 ‘보차(普茶)’는 보이차를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보이차에 관한 사료(史料)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전’이라는 곳은 지금의 운남(雲南)을 가리킨다. 즉 보이차의 원산지는 운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차의 모양은 줄기 형태가 아닌 덩어리 상태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년간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불구하고 운남 지역에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덩어리 형태의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차의 총애는 청나라 들어오면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공으로 바치는 공차(貢茶)의 가지 수는 무려 여덟 가지다. 물론 모양도 다르고 무게도 달랐다. 이중 가장 큰 것은 마치 사람의 머리모양과 같은 것으로 무게는 자그마치 다섯 근이다. 이를 ‘인두공차(人頭貢茶)’라고 한다. 지금도 금과공차(金瓜貢茶)가 하나 남아있어 항주의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中國農業科學院茶葉硏究所)에서 소장하고 있다.

청나라부터 흥하기 시작한 보이차의 인기는 청나라와 함께 스러져갔으니 이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이차가 공차로 지정된 것은 1729년 옹정(雍正) 10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도달하자 혼란과 소요로 인하여 공차는 방화와 약탈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에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908년 광서(光緖) 30년 때 공납을 폐지시켰으며, 200년 동안 궁중의 영욕과 함께 했던 보이공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진다.

조공으로 바쳤던 공차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운남에서 보이차를 운영하는 상점들이 상당했다. 대부분 이무(易武)라는 곳에 모였다. 가게에 따라 취급하는 품목의 질도 각자 달랐다. 대체로 품질 좋은 것은 해외로 갔고, 질이 낮은 것은 티베트, 몽골, 위구르 등 빈민지역에 팔았다.

차라는 것은 원래 잎으로 만든 줄기형태인데, 운반할 때 부피가 크고 쉽게 끓어지는 단점도 지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된 방법이 바로 찻잎을 압착하여 긴압차(緊壓茶)로 만드는 것이다.

보이긴압차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둥근 형태의 원차(圓茶)이다. 원차의 무게는 357g이다. 예로부터 일곱 편을 묶어 죽순껍질로 포장하는 것이 전통방법이다. 조정으로 보낸 공차는 말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찻잎을 원료로 삼는다. 좋은 찻잎이란 봄에 딴 여린 찻잎 춘첨(春尖)을 말한다. 그러나 민간의 상품은 그러한 고급 찻잎만을 쓸 수가 없다.

이에 민간 보이차는 대부분 가공할 때 비율에 따라 찻잎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혼합 찻잎의 등급은 1, 3, 5, 7, 8, 9의 6등급으로 나뉘는데, 대체로 보이차 겉 표면에는 20%정도의 3등급 찻잎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7등급 20%, 8등급 30%, 9등급 40%의 비율로 채운다. 물론 좋은 등급의 찻잎은 잎차 형태 즉 산차(散茶)로 10등급으로 나눠 비싸게 내다판다.

둥근 형태의 원차는 70년대 접어들어 이름을 ‘칠자병차(七子餠茶)’로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또 다른 형태의 보이차가 보이는데, 사발처럼 생긴 타차, 심장모양처럼 닮은 긴차(緊茶) 그리고 네모난 모양 중 벽돌처럼 생긴 전차와 정사방형의 방차(方茶)가 있다.

가장 오랜 정통을 지니는 차는 병차와 방차이다. 특히 방차는 공차로서 청대부터 ‘복록수희(福祿壽禧)’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사희방차(四喜方茶)’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티베트로 공급하는 차는 심장처럼 만든 긴차였다. 모양이 버섯처럼 생겼다하여 ‘마고두’라고도 한다. 1967년 보다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모양을 벽돌처럼 바꾼 것이 전차에 관한 유래이다. 긴차는 1986년 당시의 반선(班禪)라마의 요청으로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 시장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그릇처럼 생긴 타차는 1902년 운남 하관(下關)의 차상들이 둥근 형태의 ‘구냥단병차(姑娘團餠茶)’라는 작고 둥근 보이차를 그릇의 모양으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 유래다. 타차는 지금 사천(四川), 중경(重慶) 지역에서도 만든다.

보이차 이여기 3

보이차의 명성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3

보이차는 지금 ‘세계호’의 깃발을 달고 쾌속으로 항진하고 있다. 보이차를 한번쯤 접해본 사람이면 너나할 것 없이 보이차에 대해 ‘한 말씀’ 할 정도로 보이차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보이차 브랜드의 형성’이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항간에서는 “보이차, 별 불일 없는 차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난한 변방소수민족들이 마시던 조잡한 차를 홍콩, 타이완 장사꾼들이 유행하게 만든 것이 보이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류에 따라 상인들의 ‘띄우기 작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상업주의에 의해 탄생된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보이차’라는 것이다.

상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학자의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학자의 선행연구 성과를 통해 상품의 시장 활성을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품을 후속작업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다. 보이차 연구는 후자에 속한다. 뒤늦게 출발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팽창속도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이다. 그러는 동안 보이차 시장은 너무 커버렸고, 결국 학자들의 연구는 항상 뒷북치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물론 필자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다.

‘묵힘’이라는 것은 시간적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처럼 보이차는 진정 별 불일 없는 차인가? 역사적으로 중국 상류층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지금의 필자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의 답’이라는 의미는 몇 개월 전만해도 필자의 답이 ‘그렇다’라는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이자, 그러한 잘못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필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보이차는 적어도 청나라 초기부터 중국 집권층, 상류층들이 마셨던 차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발견된 최초의 글은 한국의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과 청나라간의 정치ㆍ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기록문학인 <연행록(燕行錄)>이 그것이다. 연경(燕京)은 북경 즉 지금의 베이징을 말하며 청나라 때의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외교 사신들의 임무수행 이외 많은 식자들이 사행(私行)으로 중국에 건너가 외국의 제도나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사행에 참가하여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당대의 지배층 식자들로서 그들이 만나고 보았던 연경의 실상은 청나라의 지배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그들의 기록은 곧 청나라당시의 풍속도이자 현실문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경에는 보이차가 있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와 <계산기정>에서 모두 보이차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연원직지>다. “차의 품목의 수는 다양하다. 그들은 황차(黃茶)와 청차(靑茶)를 항시 이용하며, 그 다음은 향편차(香片茶)이다.

그러나 가장 진귀하게 여긴 것이 보이차다. 다만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라는 기술은 당시의 수도인 연경에서도 ‘짝퉁’ 보이차가 등장할 만큼 수요층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시 권력 지식층의 기록한 한문으로 쓴 연행기 이외 여성 및 일반 독자를 의식하여 별도로 쓴 국문본인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도 보이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연도(燕都)에서는 차의 품목이 많고 성행하는데, 이 중 보이차가 제일이요, 백호차(白毫茶)가 둘째, 청차가 셋째, 황차가 넷째다”라고 했다. 특히 오늘날 ‘고증학의 총화’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경의 고증은 당시의 보이차가 진귀함과 더불어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청나라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보이차를 마셨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청의 건륭황제는 보이차에 대해 “오직 보이차만이 묵직하고 품위가 있다 … 육우도 응당 서투름과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라고 하였고, 조선 정조의 둘째 사위이기도 한 홍현주(洪顯周)는 “대나무 차통에서 고운 흰 비단을 풀어보니 둥근 달과 같은 보이차가 보인다” 등의 시구(詩句)를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보이차가 21세기뿐만 아니라 17세기 청나라 때부터 이미 중국의 최고명차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보이차 이야기 2

보이차의 역사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2

청나라 보이부의 유적지로 지금은 문창공이란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 현재 보이현에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보이차에 대한 혼란은 진실과 거짓의 갈등 속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의 거짓말에 거짓말이 보태지는 이와전와(以訛傳訛)의 혼전 속에 보이차 문화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보이차 문화를 가리켜 ‘양두구육(羊頭狗肉)’ 즉 양머리를 대문 앞에 달아놓고 개고기를 파는 격의 ‘짝퉁문화’라고 비아냥거린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그리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보이차’의 선택도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은 보이차에 대해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그 정보는 어느 정도로 깊이가 있으며 근원적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당신이 보이차를 선택하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한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어도 스스로가 지식을 활용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기억이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준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보이차의 진실 규명은 우리 모두의 의지가 하나가 돼야만 이루어질 수가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동안 떨어진 보이차의 신뢰를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건전한 의도와 과학적 검증이 어우러져야만 보이차의 진정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차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앞서 그 이름의 유래와 의미라는 원초적 문제부터 풀어보는 것이 순서인듯 싶다. 중국 독음으로 ‘보이’를 ‘푸얼’이라고 부른다. 이에 ‘보이차’와 ‘푸얼차’는 같은 것으로, 모두 중국 운남(雲南)지역에서 만든 차의 이름을 일컫는다. ‘보이차’라는 이름은 명ㆍ청 시대 당시의 전남 곧 지금 운남 지역의 서쌍판납(西雙版納)과 사모지구(思茅地區) 특히 소위 6대 차산(六大茶山)에서 생산된 찻잎으로 당시의 행정소재지였던 ‘보이부’에서 가공ㆍ판매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보이현 문창공

‘보이현’이란 지명은 청나라 옹정(雍正) 7년(1729)부터 연차적으로 보이부, 보이진을 거쳐 오늘날까지 약 2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이현의 정식 명칭은 ‘보이하니족이족자치현’이며 1985년 12월 15일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을 오늘까지 사용하고 있다.

‘보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이곳 토착민인 하니족(哈尼族)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普)’자는 성채의 뜻을 가진 ‘채(寨)’를 뜻하며, ‘이’자는 물굽이의 뜻을 지닌 ‘수만(水灣)’을 뜻한다. 이러한 토착민의 어원에서 비추어볼 때 ‘보이’라는 의미는 곧 물굽이가 있는 성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의 물굽이는 란창강(瀾滄江)을 말한다. 란창강의 원류는 중국 티베트이며, 전체길이는 약 4,020㎞이다. 티베트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운남성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 흘러들어가 메콩강으로 변한다. 중국 영내에서는 1,800㎞만 흐르고 있다.

운남성의 행정구역 중 가장 넓은 지역이 사모(思茅)지역이다. 오늘날 보이현의 행정구역이 바로 이 사모시(思茅市)에 속해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사모시의 차 재배면적이 약 102만 무(畝)에 이른다고 한다. 한 무를 200평으로 계산한다면 약 6만8천 헥타르라는 숫자가 나온다.(1 헥타르는 약 3,000평에 해당한다) 이 숫자는 한국의 전체 차 재배면적인 2천 5백 헥타르보다 무려 28배에 가까운 숫자다. 차의 전체 생산량은 3만 톤이며, 생산농가는 약 20만 가구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력은 무려 106만 명에 달한다. 사모시의 전체 인구가 250만인 것을 보면 2.5명 중 한 명이 차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모시의 10개 현(縣) 중 보이현의 차 재배면적은 6만1천 무, 즉 4천 헥타르이고, 차 생산량은 1천2백 톤 정도에 불과하다. 사모시 전체 차 생산량 1/30 밖에 되지 않는 보이현이 이제 보이차의 산업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 시정부의 판단이다. 그래서 사모시의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 안건은 현재 중국 중앙정부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내용인 즉 사모시(思茅市)의 명칭을 보이시로 바꾸는 작업이다.

자료에 따르면 ‘보이시’로 개명되면 그 경제 시너지 효과는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어느덧 보이차의 위력은 마시는 ‘차’라는 단순경제에서 벗어나 문화ㆍ관광ㆍ건설 등 산업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데 있어 동력의 핵심으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보이차 이야기 1

(붓다뉴스 2006년1월5일 기사 옮겨온 내용 )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
이래저래 우울한 을유(乙酉)년 세밑을 보냈다. 병술(丙戌)년 새해, 우리는 을유년의 첫날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희망과 행복을 품고 한 해를 시작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새해의 소망’란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 바로 ‘건강’이라고 한다. 건강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영원한 숙제다.

지난해 건강에 관해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했던 일이라면 단연코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쇼킹한 사건은 우리의 건강과도 직결되었던 문제이기에 그 공허함이 한층 컸다. 한편 젊은 층 사이에 불었던 ‘웰빙(Well-being)’ 열풍은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무섭게 확산됐다. 그 열풍은 새해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보이차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는 짱유화 교수(한서대)

웰빙 문화의 핵심은 물질적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웰빙 문화 속에 다양한 건강기능성식품들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이에 그 동안 영양보충제의 대표적 상품이라 여겨왔던 비타민, 무기질제제 등 식이보충제들이 서서히 지고,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대표주자 중의 으뜸이 바로 차(茶)다. 차는 기호음료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이젠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대 건강식품에 차가 포함되었던 것도 이러한 반증이다.

건강기능성식품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강력한 항산화물질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다. 산화방지제로서 그동안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비타민이었다. 그러나 최근 산화방지제 연구의 관심사는 비타민에서 폴리페놀이란 물질로 옮겨가고 있다.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폴리페놀 추출물에는 산화에 의한 병폐를 막는 식물성 항산화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비타민류와 비교해 볼 때 적게는 40배에서 많게는 100배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폴리페놀은 피를 맑게 하고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기능이 탁월한 성분이다. 이러한 폴리페놀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이 바로 차다. 그리고 차 중에서도 보이차 속에 가장 많이 함유되어있다.

21세기 중국에서 생산된 차 중에 가장 돋보인 차를 꼽는다면 단연 보이차이다. 보이차는 중국차의 명성을 높이고 위상을 고양시킴으로서 이젠 중국차의 또 다른 대명사로 굳어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 중국 내에 보이차 전문판매상점은 무려 2만개 넘었다고 한다. 작년 한해 출간된 보이차 관련도서는 18권이며, 이는 차에 관련도서 부문에 37%를 차지하는 수치다. 그리고 보이차만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도 5개나 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보이차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장래가 그리 밝지 않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보이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 보이차를 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보이차의 제작 방법에 대한 논란과 관계없이 이미 싸늘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보이차는 희극적인 소설과도 같다. 그래서 보이차를 가리켜 ‘수수께끼의 차’라고 한다. 누구나 보이차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르는 것이 또한 보이차다. 다시 말해 입문은 쉽지만 졸업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보이차 공부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연말특집호에서 2006년 세계의 화두(話頭)는 지식(knowledge)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최근 보이차 상품에서 발견된 흠결이 지식과 충돌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학문이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오류를 줄이고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 이에 아무리 세계적인 학자의 연구 성과라도 완전무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필자의 보이차 연구에 대한 결과도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에 관한 연재의 변을 단 것은 지식추구이라는 명제 아래 보이차의 베일을 벗김으로서, 독자들이 보이차에 대한 판단을 조금이라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쨩유화 교수는?

1955년 대만 生. 2005년 중국정부로부터 ‘보이차 세계 10대 권위자’로 선정되기도 한 보이차 전문가이다. 현재 한서대 차학과를 비롯해 중국 남경대, 절강수인대, 운남성 국립보이차연구원 등에서 연구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