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5일 화요일

보이차의 역사

商周時代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雲南(운남)의 복족( 族) 사람들은 이미 보이차 나무를 심었고 보이 차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史料에는 복족인들이 상왕(商王)에게 키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商나라 때 복족인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때 常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 촉(蜀)의 군대를 얻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공납케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巴蜀의 군대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인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운남은 차의 고향이니, 이로써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인들은 이미 차잎을 생산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 12 쪽에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그 지역은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설은, 상주(商周)시기에 운남에서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시기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의 옥쇄를 하사하였다.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 池縣)을 다스렸다. 三國時期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도( )라고 부르고, 선(選)이라고도 부른다.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山陵의 경계에서 자란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채집해 말린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도( )자는 문장 뜻에 비추어 볼 때, 차잎이니, 운남지역에서 한(漢)나라 시대에 茶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남겼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의 시작을 펼쳤다. '茶山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는데, 五山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자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무후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공명(孔明)선생이다.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다, 지금의 운남성 西雙版納(서쌍판납)자치주,  海(맹해)의 南 山(남나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 중에서 "5월에 瀘江(지금의 금사강)을 건넜다"고 기록한 것은 곧 전남( 南)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지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夷族(이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의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전해 심은 것이어서 夷民族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야사로서 전해지고 있지만, 보이차의 正史적 기록이 없는 시기에는 매우 의존 할만하다.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번작(樊綽)이 벼슬을 버리고 운남의 南沼地(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蠻書(만서)>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 지역의 여러 산에서 생산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라 는 기록이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 지역은 지금의 운남성 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를 생산하였을 뿐만아니라, 5백여리 밖에까지 판매 공급되어서,  海(이해) 부근의 몽사(지금의 운남성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음용했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잎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은생성 지역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잎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를 비추어 보면, 은생성 지역의 차는 당연히 운남의 대엽차종 종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엽차종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종이고 보이차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지역에서 나는 차잎은 당연히 보이차의 시조이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가 같아서 당나라 때 은생성 지역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고 본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 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 길"이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육우(陸羽)는 당대의 차에 있어 큰 스승이다. 그의 저서 <다경(茶經)>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차관련 저서로 평가받고, 그런 이유로 [다신(茶神)]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육우와 함께 이름을 날린 차의 대가로 문인인 노동(盧仝)이 있다.

송대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수시로 채취하여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잎은 여전히 확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송시기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잎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 외에 더욱 중요한 점이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차잎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왕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 수 있으며 "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확고한 사실이 됐다.

원대

원(元)나라는 전체 중국차 문화의 전승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원나라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를 남겼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가는데, 그가 마신 차나무 잎은, 바로 운남 대엽차종의 후손일 것이며 다시 말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으며,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런데 원나라에서부터 보이차는 그 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普 府)로 되었다. 이로부터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힌 이 지역 시장에서 매매하는 필수상품이 되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 이 때부터 그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 사조제(謝는肇 )는 그의 <전략( 略)>중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보차"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인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가 쓰고, 그의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에 의해 1664년에 출판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 것을 참고 할 수 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케 하였다. 이에 1391년에 "용단(龍團,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공납하라"는 공차 개혁의 명을 내려, 검소하고 소박한 사회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는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운남에서 흥기하여, 운남과 서역 사이를 대상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 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와서. 차잎으로 교환하여 갔다.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사람과 말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전문 교역로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서쌍판나의 6대 차산 지역의 남쪽 끝인 이무진(易武鎭)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보이진과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이러한 운남의 경내를 거치는 길을"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이무진에서 석고진으로 이르는 돌로 포장한 길은 "석괴고차도(石塊古茶道)"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석고진에서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고차도와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茶道의 길을 따라 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잎의 제일 중요한 중심집산지로 개발되었고, 점점 상인들은 운남 차잎과 보이부가 하나로 인식되게 되어,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 지역내의 교목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 제품은 모두 일률적으로 보이차라고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청대

청대의 보이차는 환골탈태하여 귀중시 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공차가 되어 가장 빛나고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성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옹정(雍正)황제는 1726년에 만주족인 심복대신 악이태(鄂爾泰)를 운남총독으로 임명하고, 3년 뒤 "보이부치(普 府治)"를 설치하여 보이차의 매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 해 가장 여린 잎으로 만든 차를 진상케 하는" 정책을 써서 가장 좋은 보이차를 북경에 공납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어 수차례 황제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다.

매년 보이차의 제작과 운영을 위해, 청나라 조정은 보이부의 영이(寧 )지방에 보이공차 공장을 건립하여, 매년 청조정에 공차를 진상했는데, 그 가치가 당시에 쌀을 십여만 섬을 살수 있는 금액이었다.
공차의 종류는 8가지로 오근단차(五斤團茶), 삼근단차(三斤團茶), 일근단차(一斤團茶), 사량단차(四兩團茶), 일량오전단차(一兩五錢團茶), 병장아차산차(甁裝芽茶散茶), 예차산차, 갑장차고(匣裝茶膏) 등이다.

보이현 서문산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황궁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普 女芽茶), 보이다고(普 茶膏)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서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가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시작되었다가,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보이 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근 200년 동안 깊은 찬사 속에서 마셔졌다. .청대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순하고 진하여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들에게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따라 보이차를 만드는 차장(茶莊, 차상점)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 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元泰豊) 등의 차장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서쌍판납의 6대차산의 최고 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 차산을 드나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 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중국내 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 차산의 차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차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 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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