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답을 하기전에 우선 아래 내용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일반 모든 차는 채엽 지역과 제조 공정의 차이 및 보관 방식의 의해서 맛과 향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차가 어디에서 생산이 되었는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대개 유명한 차의 이름을 보면 지명 이름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의 차엽으로 용정, 암차, 보이차를 만들더라도 그 지역에서 나온 차의 맛을 모방을 할 수는 있지만 더 우수한 맛을 얻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생차의 품질이 우수하여 후발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감별하는 기준은 회운이 있는가 입니다. 회운은 차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성분이 조화를 이뤘을때만 발생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회운이 있는 생차는 후발효를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회운의 등급이 존재합니다. 회운의 등급이 차 가격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우수한 원료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제조공정은 그 차의 맛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고급원료일때 고급품이 되고, 중급 원료라면 중급품이 되는 것이며, 제고 공정의 실수에 의해서는 단지, 고급품이 중급품이 되는 것이지, 아무리 제조공정을 잘 하더라도 중급 원료가 고급품으로 변모하지 못합니다.
올해 만든 청병인데 홍차나 황차의 맛이 난다면 어떤가요??
=> 차엽 산지와 제조공정의 문제입니다. 운남의 북부지역인 임창시에서 생산되는 차청은 홍차를 제작하기에 적합한 원료입니다. 봉경, 맹고 지역이 모두 임창시에 속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만이 전홍 특유의 향과 맛을 내게 해 줍니다. 질문하신 분이 홍차맛이 난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 요인에 기초를 둡니다. 첫째는 그 차의 원료 생산지가 임창시의 북부지역에 나온 차청으로 생차를 만들었을 경우에 전홍과 유사한 맛과 향이 나옵니다. [봉경차창에서 나온 청병을 드셔보시면 전홍의 향과 맛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홍차의 제조공정을 먼저 이해하면 좋습니다. 위조-유념-발효-건조 과정을 거치는데, 발효는 홍배를 통해 하는 경우와 50cm 높이로 퇴적층을 만들어서 하는 두가지 발효 공정이 있습니다. 대개 반나나 보이시는 퇴적을 통한 발효를 합니다. 맹고, 봉경은 홍배를 통해서 하는데, 홍배를 많이 할수록 향이 높아지고 낮아지기도 하는데 이 기술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홍차의 품질이 많은 차이가 납니다. 대개 사모나 반나 지역의 홍차가 향이 낮고 맛이 진하지 못한 이유는 맹고/봉경 지역보다 홍차를 생산하는 지역적, 환경적 요건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 생차 제작과정을 보면 위조-살청-유념-건조인데, 위조, 살청, 건조 과정에서 홍차 맛이 날 수 있고, 위조 과정에서 황차 맛이 날 수 있습니다. 홍차의 발효는 퇴적을 통하거나 열을 가하여 발효를 시킵니다. 만약 봉경이나 맹고지역의 차청을 위조, 살청, 건조시에 잘못 한다면 쉽게 전홍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차가 열을 받아서 발효가 되면 쉽게 나는 향과 맛이 홍차의 향과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고/ 봉경지역의 전홍이 유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차에서 홍차의 유사한 맛이 난다면 맹고 혹은 봉경지역의 차청으로 생차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시 한번 제조과정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차의 맛이 나는 경우는 위조과정을 하기전 오래동안 보이차 원료를 퇴적하여 자연적으로 습열에 의해서 발효가 진행이 되어 버려서 답답한 향이 나고 발효도가 다른 생차에 비해서 더 오래되어 보이고 탕색이 혼탁한 경우가 있습니다. 황차의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제작 과정은 민황입니다. [시음기 몽정황아를 참고 하세요] 명대 녹차의 제조공정의 변이가 황차를 발명하게 하였듯이 현재 황차의 민황 제조과정은 녹차를 만들기에는 부적절한 여름, 가을등의 차를 민황을 통해 고삽미를 줄여주고 향을 높여주고 맛을 부드럽게 해 주는 역할로 기술이 진보하고 있습니다. 생차에서 황차향이 난다면 그 차의 고삽미가 충족한지를 잘 살펴보고 후발효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보이차의 기준으로 봤을때 이러한 차를 어떻게 평가 해야 할지 궁금하네요..
=> 생차를 구분하는 기준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생차 그대로 받아 들인 다음 고삽미를 측정하고 회감과 회운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신차에서 고삽미가 없다면 후발효 요소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회운이 있는 전제하에서 10년된 차도 고삽미가 있는데, 신차에서 10년된 차보다 낮은 고삽미를 갖추고 있다면 후발효를 진행할 성분이 부족합니다.] - 단지 아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고미이고 삽미인지를 혼돈한다는 것입니다. 차에서 느껴지는 쓰고 떫은맛을 음식이나 과일에서 느끼는 쓰고 떫은 맛으로 생각하면 차에서 느껴지는 삽미를 매우 쉽게 고미로 착가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음식이나 과일을 먹고 느끼는 떫은 맛은 물질을 씹거나 목구멍에 넘어간 후 입안에 남는 떨떨한 느낌을 떫은 맛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는 찻물이 입안에 들어갈 때 고미와 삽미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을 정확하게 구분을 지을수 있을 때 차의 고삽미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습니다. [고삽미를 정확히 구분지을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차인을 만나보았지만 고삽미를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을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이차에 빠지는 가장 큰 매력인 회감과 회운을 느낄수 있다면 어떤 보이차를 수장해야 할 보이차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기 보이차를 드셔보시면 쉽게 이 문제의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를 보관해도 좋을지 궁금합니다..
=> 충족한 고삽미가 있다는 말은 회감과 회운을 충분히 잘 불러 오는 고삽미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홍차 혹은 황차 맛이 난다고 해서 모두 후발효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의 차이를 잘 파악 해야 합니다. 충족한 고삽미가 있는지를 구감으로 느껴 보시고 뒤에 따라오는 단 맛과 운기를 느낄 수 있다면 수장을 해도 무방합니다. 반대로 고삽미가 적고 혀를 자극하는 고미에 치우치고 삽미가 부족하거나 탕색이 흐릿할 경우에는 정도에 따라 수장을 할 수 있지만 수장 가치는 매우 떨어집니다. 신차는 이미 상대적으로 가격이 많이 저렴합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차를 수장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차가 남의 손에 보관이 되어 10여년이 지난다음 맛이 괜찮아 졌을때 바로 구매해서 마셔도 시간은 늦지 않습니다. 10여년이 지나도 가격은 10년된 진년 보이차 중에서 가장 저렴한 차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수한 원료를 사용하여 실수없는 공정으로 생산된 보이차가 10년이 지나도 우수한 보이차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차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숙차와 습창차의 차이 - 자운오색
보이차 찻잎을 변화시키는 요소는
(1) 찻잎에 존재하는 효소 작용[홍차 발효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2) 곰팡이류에 의한 변화 작용 [미생물도 곰팡이의 일종입니다.]
(3) 공기에 의한 산화작용 [모든 차는 공기에의한 산화 발효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숙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2)+(3)
습창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2)+(3)
건창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3) <-- 이것도 (1)+(2)+(3) 입니다.
지금은 습창차의 감소로 인해 매변현상에 대한 단어 사용도 많이 감소하였습니다. 우선, 매변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매변: 곰팡이균이 변한 것입니다. 즉, 정상적인 미생물 발효에 의한 발효가 아닌 과도한 습에 의해서 불필요한 곰팡이균이 생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전통 방식은 습창과 건창의 구분을 매변현상으로 나눴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 코, 구감에 의지해야 하는 감별기준은 매변현상에 대한 기준을 만족하기에 매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오히러 그런 보이차를 좋은 보이차로 생각하고 마셨던게 사실입니다. 보이차 연구의 발전과 지식이 보급 되면서 습창[임의적]과 자연습[비임의적], 건창으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습을 받은 보이차와 받지 않은 보이차의 가격차이가 많게는 두배, 적게는 한배정도 차이가 납니다. 이러다 보니 많은 카페에서 같은 보이차를 판매하는데 가격 차이가 많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습을 일단 과도하게 받은 보이차는 영원히 그 수준에서 조금 회복되기 때문에 값싸게 판매하는 경우가 많고 건창만 수장하여 더 값비싼 가격에 거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건창 보이차를 구매하려면 시장가격보다 20-30%는 더 주고 구매해야 거래가 성사되는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모르는 소비자는 포장지만 같으면 덩달아 판매하는 차상에 의해서 많은 소비자가 손해를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향후 2-3년이 흐르면 진실을 알게 될것입니다. 세상에 공떡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공떡을 만족하기 위해서 습창차가 생산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형태로 따졌을 때 숙차하고 습창차하고의 구분을 어떻게 생각 해야 할지 궁금 합니다..
=> 숙차와 습창차의 구분은 산차형태와 긴압에 있습니다.
숙차는 산차가 고온고습에 의해서 발효가 되는 것이고, 습창차는 긴압된 상태에서 고온고습에 의해서 발효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공정 증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마지막 공정 멸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습창차를 어느 부분까지 인정을 하고 마셔도 될지하는 문제가 나올것 같은데요..
=> 이 부분은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고정관념을 버리고 제대로된 교육 재료로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금방 알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교육을 받은 로카와 또 다른 한분은 단번에 습창차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루면 됩니다.^^
(1) 찻잎에 존재하는 효소 작용[홍차 발효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2) 곰팡이류에 의한 변화 작용 [미생물도 곰팡이의 일종입니다.]
(3) 공기에 의한 산화작용 [모든 차는 공기에의한 산화 발효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숙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2)+(3)
습창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2)+(3)
건창차에 관련된 변화요소는 (1)+(3) <-- 이것도 (1)+(2)+(3) 입니다.
지금은 습창차의 감소로 인해 매변현상에 대한 단어 사용도 많이 감소하였습니다. 우선, 매변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매변: 곰팡이균이 변한 것입니다. 즉, 정상적인 미생물 발효에 의한 발효가 아닌 과도한 습에 의해서 불필요한 곰팡이균이 생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전통 방식은 습창과 건창의 구분을 매변현상으로 나눴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 코, 구감에 의지해야 하는 감별기준은 매변현상에 대한 기준을 만족하기에 매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오히러 그런 보이차를 좋은 보이차로 생각하고 마셨던게 사실입니다. 보이차 연구의 발전과 지식이 보급 되면서 습창[임의적]과 자연습[비임의적], 건창으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습을 받은 보이차와 받지 않은 보이차의 가격차이가 많게는 두배, 적게는 한배정도 차이가 납니다. 이러다 보니 많은 카페에서 같은 보이차를 판매하는데 가격 차이가 많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습을 일단 과도하게 받은 보이차는 영원히 그 수준에서 조금 회복되기 때문에 값싸게 판매하는 경우가 많고 건창만 수장하여 더 값비싼 가격에 거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건창 보이차를 구매하려면 시장가격보다 20-30%는 더 주고 구매해야 거래가 성사되는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모르는 소비자는 포장지만 같으면 덩달아 판매하는 차상에 의해서 많은 소비자가 손해를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향후 2-3년이 흐르면 진실을 알게 될것입니다. 세상에 공떡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공떡을 만족하기 위해서 습창차가 생산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형태로 따졌을 때 숙차하고 습창차하고의 구분을 어떻게 생각 해야 할지 궁금 합니다..
=> 숙차와 습창차의 구분은 산차형태와 긴압에 있습니다.
숙차는 산차가 고온고습에 의해서 발효가 되는 것이고, 습창차는 긴압된 상태에서 고온고습에 의해서 발효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공정 증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마지막 공정 멸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습창차를 어느 부분까지 인정을 하고 마셔도 될지하는 문제가 나올것 같은데요..
=> 이 부분은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고정관념을 버리고 제대로된 교육 재료로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금방 알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교육을 받은 로카와 또 다른 한분은 단번에 습창차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루면 됩니다.^^
2008년 11월 25일 화요일
여러가지 상식 - 자운오색
그중 제가 다니는 회사가 항주지역에 있어 서호용정을 받아 마시는것은 그동안 서호 용정을 마셨던 차라 괜찮은데... 제가 정주나 낙양지역에 출장을 갈경우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양 지역의 "신양 모첨"이라는 차를 받는데 중국명차라고 하면서 신양지역 차도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양 모첨" 종류의 차는 잘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다지 입에 와 닫지 않는데 신양지역 차의 특징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 녹차처럼 색,향,미로 등급이 분류되는 차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등급의 녹차는 반드시 유리컵에 우려 마시면서 차엽, 탕색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며 맛과 향을 느끼고 평가 하여야 합니다. 녹차는 대개 살청 공정에 의해서 맛과 향이 달라지고 구분이 됩니다. 서로 다른 살청 공정으로 인해 용정차는 비교적 녹갈색 톤으로 어둡고 신양모첨은 진한 녹색입니다. 용청차는 구수한 맛과 향이 있는 반면에 신양모첨은 신선한 청량감이 높은게 특징입니다. 녹차에서는 쓰고 떫은 맛이 나지 않고 청량감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고 뒤에 단맛이 살짝 남으면 상등급인것 같지만, 유리컵에 비치는 엽저의 아름다움이 어느정도냐에 따라 등급이 구분되기도 합니다. 구수한 녹차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용정차를 쉽게 받아 들이는것 같습니다. 맛의 특징 차이로 인해 신양모첨이 본인의 구감에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신양모첨은 아주 좋은 차다" 라고 5일동안 매일 생각하신 다음에 한잔 우려 드셔보십시오. 맛이 놀랍게 바껴 있을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생소한 차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걱정이 먼저 앞서지는 않았는지요.]
또하나의 질문은 중국 여행중에 각 지역의 토속차들이 많은데 마셔보면 괜찮다 싶은 차도 있고 아닌차도 있는데 품질관리 기준을 알수 없어 구매 하기 어려 웠던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가계에 지역의 토속차중 "토가차"라고 있는데 이러한 차들도 마셔도 괜찮은것인지?
=> 토가차는 혹시 토가인에 의해서 만든 차를 말씀하신는 건가요? 토가인들의 그들만의 차 문화를 통해 차를 제작하고 차 도를 발전시킨 성숙한 차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입니다. 진품 토가차라면 저도 한번 마셔보고 싶네요^^ 중국내에 존재하는 차의 종류는 얼추 잡아도 백만종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셔서 괜찮다면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중에 구입하셨다고 하시니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산동 이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차가 자생하고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생산되는 해당 지역에서 소비되는 차가 대부분이고, 유명세가 있는 차만이 외부시장으로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지방 특산물이라고 해서 판매되는 생소한 이름의 녹차 500그램에 80위안이면 고급입니다. 그러나 맛은 시장의 웬만한 용정차 500위안 짜리보다 맛있습니다. 실제로 차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이 되기 때문에 가격과 맛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품질 관리 제도는 아직 시작 단계로 보이차 이외에 QS마크 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차는 없으며, 이제 철관음에 QS마크 제도를 실행할 방침입니다.
또한 가끔 우롱차 계열의 차에 인삼향을 첨가한 첨가차들을 마셔도 되는것인지 궁금합니다?
=> 인삼오룡은 재가공차의 분류에 속합니다. 재가공차에는 모리화차가 대표적입니다. 차에 기타 물질을 혼합하거나 가향을 통해 생산된 차를 재가공 차로 분류합니다. 편하게 입맛에 맞게 생산된 제품이므로 차가 전해주는 자연스러운 맛을 얻기는 힘듭니다. 재가공차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저렴한게 특징입니다. 입맛에 맞는다면 마셔도 됩니다. ^^
혹시 한국에 잘알려져 있지 않은 차종중에 한번쯤 마셔봐도 괞찮은 차가 있다면 소개시켜 주시고요 허접한 질문이나 그동안 중국인에 물어봐도 차를 제대로 모르니 대답해줄 사람이 없더군요.(제가 만나는 중국인들은 차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그리고 통역을 시켜 질문하니 대답또한 정확치 않고...) 정말로 중국차 많고도 많은데 좋은차는 무엇인지 ? 소위 10대 명차라고 하는 차들의 수준과 그밖의 차들의 차이는 어느정도인지 궁금합니다.
=> 중국 사람이니까 중국차를 잘 알것이라는 것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차를 잘 알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인구의 1%만 차를 잘 안다면 중국 차 시장이 이렇게 낙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차는 누가 마시느냐, 제조 공법에 따라 유행이 쉽게 바뀝니다. 10대 명차의 분류는 매 왕조마다 다릅니다. 황제가 두기 보이차를 좋아하면 높은 관리들도 두기 보이차를 즐겨 마시게 됩니다. 높은 관리가 두기 보이차를 즐겨마시면, 귀족 계층과 돈이 많은 계층도 기득권 세력과 같은 유행을 즐기기 위해 두기 보이차를 마시고 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구조가 형성이 되면 자연적으로 두기 보이차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백성들은 감히 마시지 못하는 비싼 차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구입하게 되면서 유명한 차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왕조에는 이런 10대명차가 있었구나 쯤으로 생각하시면 되고, 지금에도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10대명차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차를 판매하기위한 광고 수단이지, 지금도 그 당시의 차 맛이 가장 뛰어나고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중국차는 정말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한국차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단지, 유행에 따른 수요의 차이로 판단하시면됩니다. 지금 생즉님이 맛있다고 생각하시는 차가 가장 맛있는 차가 아닐까요? ^^ 좋은 차를 발견하고 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면 무엇이 좋은 차인지를 알 것입니다.
=> 녹차처럼 색,향,미로 등급이 분류되는 차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등급의 녹차는 반드시 유리컵에 우려 마시면서 차엽, 탕색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며 맛과 향을 느끼고 평가 하여야 합니다. 녹차는 대개 살청 공정에 의해서 맛과 향이 달라지고 구분이 됩니다. 서로 다른 살청 공정으로 인해 용정차는 비교적 녹갈색 톤으로 어둡고 신양모첨은 진한 녹색입니다. 용청차는 구수한 맛과 향이 있는 반면에 신양모첨은 신선한 청량감이 높은게 특징입니다. 녹차에서는 쓰고 떫은 맛이 나지 않고 청량감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고 뒤에 단맛이 살짝 남으면 상등급인것 같지만, 유리컵에 비치는 엽저의 아름다움이 어느정도냐에 따라 등급이 구분되기도 합니다. 구수한 녹차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용정차를 쉽게 받아 들이는것 같습니다. 맛의 특징 차이로 인해 신양모첨이 본인의 구감에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신양모첨은 아주 좋은 차다" 라고 5일동안 매일 생각하신 다음에 한잔 우려 드셔보십시오. 맛이 놀랍게 바껴 있을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생소한 차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걱정이 먼저 앞서지는 않았는지요.]
또하나의 질문은 중국 여행중에 각 지역의 토속차들이 많은데 마셔보면 괜찮다 싶은 차도 있고 아닌차도 있는데 품질관리 기준을 알수 없어 구매 하기 어려 웠던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가계에 지역의 토속차중 "토가차"라고 있는데 이러한 차들도 마셔도 괜찮은것인지?
=> 토가차는 혹시 토가인에 의해서 만든 차를 말씀하신는 건가요? 토가인들의 그들만의 차 문화를 통해 차를 제작하고 차 도를 발전시킨 성숙한 차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입니다. 진품 토가차라면 저도 한번 마셔보고 싶네요^^ 중국내에 존재하는 차의 종류는 얼추 잡아도 백만종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셔서 괜찮다면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중에 구입하셨다고 하시니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산동 이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차가 자생하고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생산되는 해당 지역에서 소비되는 차가 대부분이고, 유명세가 있는 차만이 외부시장으로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지방 특산물이라고 해서 판매되는 생소한 이름의 녹차 500그램에 80위안이면 고급입니다. 그러나 맛은 시장의 웬만한 용정차 500위안 짜리보다 맛있습니다. 실제로 차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이 되기 때문에 가격과 맛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품질 관리 제도는 아직 시작 단계로 보이차 이외에 QS마크 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차는 없으며, 이제 철관음에 QS마크 제도를 실행할 방침입니다.
또한 가끔 우롱차 계열의 차에 인삼향을 첨가한 첨가차들을 마셔도 되는것인지 궁금합니다?
=> 인삼오룡은 재가공차의 분류에 속합니다. 재가공차에는 모리화차가 대표적입니다. 차에 기타 물질을 혼합하거나 가향을 통해 생산된 차를 재가공 차로 분류합니다. 편하게 입맛에 맞게 생산된 제품이므로 차가 전해주는 자연스러운 맛을 얻기는 힘듭니다. 재가공차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저렴한게 특징입니다. 입맛에 맞는다면 마셔도 됩니다. ^^
혹시 한국에 잘알려져 있지 않은 차종중에 한번쯤 마셔봐도 괞찮은 차가 있다면 소개시켜 주시고요 허접한 질문이나 그동안 중국인에 물어봐도 차를 제대로 모르니 대답해줄 사람이 없더군요.(제가 만나는 중국인들은 차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그리고 통역을 시켜 질문하니 대답또한 정확치 않고...) 정말로 중국차 많고도 많은데 좋은차는 무엇인지 ? 소위 10대 명차라고 하는 차들의 수준과 그밖의 차들의 차이는 어느정도인지 궁금합니다.
=> 중국 사람이니까 중국차를 잘 알것이라는 것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차를 잘 알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인구의 1%만 차를 잘 안다면 중국 차 시장이 이렇게 낙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차는 누가 마시느냐, 제조 공법에 따라 유행이 쉽게 바뀝니다. 10대 명차의 분류는 매 왕조마다 다릅니다. 황제가 두기 보이차를 좋아하면 높은 관리들도 두기 보이차를 즐겨 마시게 됩니다. 높은 관리가 두기 보이차를 즐겨마시면, 귀족 계층과 돈이 많은 계층도 기득권 세력과 같은 유행을 즐기기 위해 두기 보이차를 마시고 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구조가 형성이 되면 자연적으로 두기 보이차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백성들은 감히 마시지 못하는 비싼 차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구입하게 되면서 유명한 차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왕조에는 이런 10대명차가 있었구나 쯤으로 생각하시면 되고, 지금에도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10대명차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차를 판매하기위한 광고 수단이지, 지금도 그 당시의 차 맛이 가장 뛰어나고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중국차는 정말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한국차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단지, 유행에 따른 수요의 차이로 판단하시면됩니다. 지금 생즉님이 맛있다고 생각하시는 차가 가장 맛있는 차가 아닐까요? ^^ 좋은 차를 발견하고 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면 무엇이 좋은 차인지를 알 것입니다.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차야시 호야시
차야시(茶也是) 호야시(壺也是)
나는 온전한 차인(茶人)도 온전한 차상(茶商)도 못되는 반쪽짜리 짝퉁이지만,
어차피 한 발씩 걸치고 살아가니 주제넘지만 허튼소릴 좀 늘어놓겠습니다.
1. 차야시(茶也是)
茶는 참으로 좋은 물건이다.
차는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고, 건강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차를 발견한 후 3.000여년 음용해 오는 동안
차에는 수많은 선인(先人)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차 맛과 향에만 너무 탐착하여
차의 참맛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인(茶人) 가운데 존경할 만한 분들도 많지만,
차인이라 자처하는 일부사람들 가운데는
자랑삼아 다력(茶歷)을 내세우는 것을 가끔 본다.
어느 잡지에서 차인 *** (차력 **년)이라고 소개된 것을 보았다.
(뭔 차력? 힘 좀 쓰는 사람인가.......?)
군에서 군 생활도 지지리도 못하는 고참이 쫄병들 앞에서만
짠밥 그릇 수를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잔을 마셔도 차 맛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을 마셔도 차 맛을 모를 것이다.
마치 평생 밥을 나르는 수저가 밥맛을 모르는 것처럼.......
차상(茶商)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차상들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가 남의 물건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보이차를 예로 들면:
내 보이차가 습이 먹었으면, 이건 자연습(自然濕)이라서 별 문제없지만,
남의 보이차가 습이 먹었으며, 그건 습창차(濕廠茶)라서 못 마실 차라고 말한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말 많은 보이차,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보이차는 좋은 차이며 죄가 없다.
차를 다루는 사람의 문제 일뿐이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는 법이다.
요즘 보이차가 대중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의나라 땅에서 나는 물건이라서,
일반 소비자들은 아직도 보이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전문가들은 너무 집착하거나 신비화하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보이차도 그 져 여러 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보이차는:
노차(老茶)가 제대로 된 보이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귀하고 비싼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보이 노차(老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요즘 만든 보이 신차(新茶)는 차 같지 않을 것이다.
보이 숙차(熟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생차(生茶)는 익지 않아서 차 같지 않을 것이다.
보이 생차(生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숙차는 탁해서 차 같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고집하면 마실만한 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보면:
숙차(熟茶)는 가격도 저렴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니
일정기간 거풍해서 숙미(熟味)가 사라지면
바로 마셔도 좋을 것이다.
생차(生茶)는 바로 마셔도 마실 만하지만,
아직 익지 않은 생차이니 잘 숙성해서
익혀 마시면 될 것이다.
보이차 가격은:
숙성년도, 보관상태, 사용한 찻잎의
품질이 각기 다르니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또한 구입량이나 판매하는 장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물건이 귀하면 값이 오르고
물건이 흔하면 값이 내리게 될 것이다.
누구나 좋은 차를 싸게 사고 싶을 것이나,
너무 싼 차를 고르다 보면 품질이 떨어지는 차를 살 수 수밖에 없다.
우리 속담에도 “싼 것이 비지떡이다”라는 속담이 있고,
중국 사람들도 “일분전 일분화”(一分錢 一分貨:그 돈에 그 물건)”이라고 말한다.
어떤 보이차가 좋은 차인가?
제 입맛에 맞는 차가 좋은 차이겠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1. 봄 차가 좋다.
교목(喬木)이든 관목(灌木)이든 야생차든 재배차든 간에
제 철에 나는 찻잎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이다.
2.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보이 생차는 후 발효 과정을 거쳐서 완성이 되는 미완의 차이다.
그러므로 후 발효가 긍정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통 보이차 제다법인 쇄청모차(曬靑毛茶: 햇볕에 말린차)로 만들어야한다.
일부 석모(石模)로 긴압(緊壓)한 차를 수제차(手製茶)라고 하는데,
채엽(採葉)~긴압(緊壓)까지 전 과정을 수공(手工)으로 만든 차가 수제차이다.
3. 잘 보관해야 한다.
보이차는 오랜 세월 후 발효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 차이므로
보관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고의로 과속(過速)한 습창(濕廠) 민창(悶廠)한 차는 퇴출되어야 한다.
건창(乾廠)으로 보관한 차가 좋은 차다.
중국의 광동은 너무 습하고, 북경은 너무 건조하고,
한국이 보이차 보관하기에 좋은 지역이다.
2. 호야시(壺也是)
자사호(紫砂壺) 역시 차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보이차와 마찬가지로 말도 많고 탈이 많은 것 같다.
각 시대의 제다법(製茶法)과 음다법(飮茶法)에 따라서
사용하는 다구(茶具)도 변화 발전해 왔다.
과거 중국 차 문화를 보면 자사호가 널리 보급되는 데는
명대(明代)의 산차(散茶:잎차)와 청대의 오룡차(烏龍茶)가 깊은 연관이 있다.
차에 따라 제다방법이 다르고 우리는 방법이 다를 뿐 아니라
사용하는 다구 또한 달라야하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중국차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차에 관계없이 자사호를 사용하여 포다법(泡茶法)으로 차를 우리고 있다.
자사호는 고온으로 우리는 잎차를 우리는데 적합한 차호이다.
보이 생차는 자사 차호로 우리는 것이 좋고,
흑차(黑茶)류, 보이 노차, 숙차는 자사 자호를 사용해도 좋으나
탕관에 끓여 마시는 것이 더욱 좋다.
자사호를 만드는 자사 니료(泥料)는
중국 의흥의 정산(丁山)에서만 나는 귀한 광물질이다.
갈수록 양질의 원료는 고갈되어가고, 자사 차호 수요량은 늘다보니
품질이 좋은 자사 차호는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고,
저질의 자사 차호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갈 명상 선생의 “완호신설(玩壺新說)”을 번역해서 연재하였으니
그 글을 참고하면 자사호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
여기서는 간략히 몇 가지 문제만 언급하겠다.
좋은 자사호는
유사한 니료를 섞거나 색료를 사용하지 않은,
순도가 높은 원석을 일정기간 풍화작용을 거친 후
숙성된 니료를 사용해서 꼼꼼하게 잘 만들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
차를 우리는데 사용하는 차호라면 수제품이든 반 수제품이든
성형방법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적당 불에 잘 구워내야 한다.
전통가마에서 장작불로 구우면 좋겠지만,
현재 의흥에는 장작불로 자사 차호를 굽는 곳은 거의 없다.
차와 잘 어울리는 글이나 그림의 각(刻)을 더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사용하는 자사호를 보면 그 사람의 차 생활이 보인다.
아무리 타고난 미인(美人)일지라도
평소 자신을 가꾸는데 등한시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자사호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작가의 비싼 차호라 할지라도
평소 진열장에 전시용으로 모셔 두거나
차를 우리더라도 잘 양호(養壺)하지 않는다면
이미 차호로써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차의 종류에 따라 차호를 구분해서 사용해야하며
사용 후에는 잘 닦아서 정갈하게 관리해야한다.
설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그 그릇에 밥을 담겠는가?
억지로 양호를 하려고 진한 찻물에 삶거나
때가 낀 차호를 억지로 문질러서 광을 내는 것은
세수도 않은 얼굴에 화장만 진하게 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사 차호를 사용하다보면
같은 차라도 사용하는 차호의 크기나 니료에 따라 차 맛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떤 니료의 차호에 어떤 차를 우려야 한다는 정설은 없다.
본인의 느낌 따라서 우리다보면 차와 궁합이 잘 맞는 차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부 차인들 가운데는 유명 작가의 고가품만을 고집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유명 작가의 작품은 예술품으로 소장할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평소 차를 우리는 차호라면 일반적인 자사호로 충분하다고 본다.
꼭 유명작가의 작품이나 고가품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흥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유명 작가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진정한 도공(陶工)의 혼(魂)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는 한국 도공들의 의식 수준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차 그릇을 애기하다 보니 문득 돌아가신 토우 선생님이 그립다.
80년대 중반 해인사 다경원(茶爐經卷) 소임을 보면서 토우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종종 다기 구하러 갔었는데, 그 당시 다기 한 벌에 2만원이었다.
누가 가든, 얼마를 사든, 다구 값이 몇 년 동안 그 값이었다.
그래서 가져다 파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해인사 스님들이 단골 고객이었다.
누가 다구 가격에 대해서 물으면, 토우 선생 왈:
“흙으로 만든 건데 2만이면 됐지요. 대부분 스님들이 가져가시는데.......”
한번은 내가 그져 별 생각 없이:
“선생님 다구 절수(切水)가 잘 안되는데 물대를 좀 개량하면 어떨까요?”
토우 선생 왈:
“그림은 화가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리는 것이지 남이 어찌 그리란다고 그렇게 그리진 않지요”
훗날 지인을 통해서 애기를 듣고 그 분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현대 차인 1세대라고 할 만한 효당 .금당. 토우선생 등
몇 분이 우리 차 문화 부흥을 위해서 애를 쓰셨는데
그 당시에는 변변한 한국 다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우선생께서 고심 끝에 약탕관을 모델로 삼아
만든 다구가 우리나라 현대 다구의 출발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어찌 자사호 애기를 하다말고.......
3. 차(茶)는 차일뿐이고 호(壺)는 호일뿐이다.
제발 “얼마짜리” “몇 년짜리” 이런 소리 좀 안 듣고
그 져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그렇게 차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가족들과 둘러앉아서, 벗이 오면 벗과 더불어서,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서,
그렇게 차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마실 때만이라도
"차 마시는 이놈이 어떤 놈인고?" 하고
참 주인공을 찾아보면 얼마나 좋을꼬.......
선방(禪房)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三惡道)를 면한다고 들었는데
차 한 잔만 제대로 마실 줄 알아도 삼악도는 면할 텐데
그리 믿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꼬........
요즘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차나 한 잔 하면서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 주위를 살펴서 자성(自省)의 계기로 삼으려 썼는데
어찌 쓰다 보니 황설 수설 알음알이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이 모양다리(相)에 집착하지 않고,
제대로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지.........
실은 저도 직업병인지, 아직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8년 4월 24일
북경 초의다실에서 감야(甘也)
나는 온전한 차인(茶人)도 온전한 차상(茶商)도 못되는 반쪽짜리 짝퉁이지만,
어차피 한 발씩 걸치고 살아가니 주제넘지만 허튼소릴 좀 늘어놓겠습니다.
1. 차야시(茶也是)
茶는 참으로 좋은 물건이다.
차는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고, 건강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차를 발견한 후 3.000여년 음용해 오는 동안
차에는 수많은 선인(先人)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차 맛과 향에만 너무 탐착하여
차의 참맛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인(茶人) 가운데 존경할 만한 분들도 많지만,
차인이라 자처하는 일부사람들 가운데는
자랑삼아 다력(茶歷)을 내세우는 것을 가끔 본다.
어느 잡지에서 차인 *** (차력 **년)이라고 소개된 것을 보았다.
(뭔 차력? 힘 좀 쓰는 사람인가.......?)
군에서 군 생활도 지지리도 못하는 고참이 쫄병들 앞에서만
짠밥 그릇 수를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잔을 마셔도 차 맛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을 마셔도 차 맛을 모를 것이다.
마치 평생 밥을 나르는 수저가 밥맛을 모르는 것처럼.......
차상(茶商)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차상들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가 남의 물건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보이차를 예로 들면:
내 보이차가 습이 먹었으면, 이건 자연습(自然濕)이라서 별 문제없지만,
남의 보이차가 습이 먹었으며, 그건 습창차(濕廠茶)라서 못 마실 차라고 말한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말 많은 보이차,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보이차는 좋은 차이며 죄가 없다.
차를 다루는 사람의 문제 일뿐이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는 법이다.
요즘 보이차가 대중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의나라 땅에서 나는 물건이라서,
일반 소비자들은 아직도 보이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전문가들은 너무 집착하거나 신비화하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보이차도 그 져 여러 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보이차는:
노차(老茶)가 제대로 된 보이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귀하고 비싼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보이 노차(老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요즘 만든 보이 신차(新茶)는 차 같지 않을 것이다.
보이 숙차(熟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생차(生茶)는 익지 않아서 차 같지 않을 것이다.
보이 생차(生茶)를 마시는 입맛에는
숙차는 탁해서 차 같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고집하면 마실만한 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보면:
숙차(熟茶)는 가격도 저렴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니
일정기간 거풍해서 숙미(熟味)가 사라지면
바로 마셔도 좋을 것이다.
생차(生茶)는 바로 마셔도 마실 만하지만,
아직 익지 않은 생차이니 잘 숙성해서
익혀 마시면 될 것이다.
보이차 가격은:
숙성년도, 보관상태, 사용한 찻잎의
품질이 각기 다르니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또한 구입량이나 판매하는 장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물건이 귀하면 값이 오르고
물건이 흔하면 값이 내리게 될 것이다.
누구나 좋은 차를 싸게 사고 싶을 것이나,
너무 싼 차를 고르다 보면 품질이 떨어지는 차를 살 수 수밖에 없다.
우리 속담에도 “싼 것이 비지떡이다”라는 속담이 있고,
중국 사람들도 “일분전 일분화”(一分錢 一分貨:그 돈에 그 물건)”이라고 말한다.
어떤 보이차가 좋은 차인가?
제 입맛에 맞는 차가 좋은 차이겠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1. 봄 차가 좋다.
교목(喬木)이든 관목(灌木)이든 야생차든 재배차든 간에
제 철에 나는 찻잎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이다.
2.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보이 생차는 후 발효 과정을 거쳐서 완성이 되는 미완의 차이다.
그러므로 후 발효가 긍정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통 보이차 제다법인 쇄청모차(曬靑毛茶: 햇볕에 말린차)로 만들어야한다.
일부 석모(石模)로 긴압(緊壓)한 차를 수제차(手製茶)라고 하는데,
채엽(採葉)~긴압(緊壓)까지 전 과정을 수공(手工)으로 만든 차가 수제차이다.
3. 잘 보관해야 한다.
보이차는 오랜 세월 후 발효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 차이므로
보관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고의로 과속(過速)한 습창(濕廠) 민창(悶廠)한 차는 퇴출되어야 한다.
건창(乾廠)으로 보관한 차가 좋은 차다.
중국의 광동은 너무 습하고, 북경은 너무 건조하고,
한국이 보이차 보관하기에 좋은 지역이다.
2. 호야시(壺也是)
자사호(紫砂壺) 역시 차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보이차와 마찬가지로 말도 많고 탈이 많은 것 같다.
각 시대의 제다법(製茶法)과 음다법(飮茶法)에 따라서
사용하는 다구(茶具)도 변화 발전해 왔다.
과거 중국 차 문화를 보면 자사호가 널리 보급되는 데는
명대(明代)의 산차(散茶:잎차)와 청대의 오룡차(烏龍茶)가 깊은 연관이 있다.
차에 따라 제다방법이 다르고 우리는 방법이 다를 뿐 아니라
사용하는 다구 또한 달라야하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중국차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차에 관계없이 자사호를 사용하여 포다법(泡茶法)으로 차를 우리고 있다.
자사호는 고온으로 우리는 잎차를 우리는데 적합한 차호이다.
보이 생차는 자사 차호로 우리는 것이 좋고,
흑차(黑茶)류, 보이 노차, 숙차는 자사 자호를 사용해도 좋으나
탕관에 끓여 마시는 것이 더욱 좋다.
자사호를 만드는 자사 니료(泥料)는
중국 의흥의 정산(丁山)에서만 나는 귀한 광물질이다.
갈수록 양질의 원료는 고갈되어가고, 자사 차호 수요량은 늘다보니
품질이 좋은 자사 차호는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고,
저질의 자사 차호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갈 명상 선생의 “완호신설(玩壺新說)”을 번역해서 연재하였으니
그 글을 참고하면 자사호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
여기서는 간략히 몇 가지 문제만 언급하겠다.
좋은 자사호는
유사한 니료를 섞거나 색료를 사용하지 않은,
순도가 높은 원석을 일정기간 풍화작용을 거친 후
숙성된 니료를 사용해서 꼼꼼하게 잘 만들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
차를 우리는데 사용하는 차호라면 수제품이든 반 수제품이든
성형방법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적당 불에 잘 구워내야 한다.
전통가마에서 장작불로 구우면 좋겠지만,
현재 의흥에는 장작불로 자사 차호를 굽는 곳은 거의 없다.
차와 잘 어울리는 글이나 그림의 각(刻)을 더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사용하는 자사호를 보면 그 사람의 차 생활이 보인다.
아무리 타고난 미인(美人)일지라도
평소 자신을 가꾸는데 등한시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자사호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작가의 비싼 차호라 할지라도
평소 진열장에 전시용으로 모셔 두거나
차를 우리더라도 잘 양호(養壺)하지 않는다면
이미 차호로써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차의 종류에 따라 차호를 구분해서 사용해야하며
사용 후에는 잘 닦아서 정갈하게 관리해야한다.
설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그 그릇에 밥을 담겠는가?
억지로 양호를 하려고 진한 찻물에 삶거나
때가 낀 차호를 억지로 문질러서 광을 내는 것은
세수도 않은 얼굴에 화장만 진하게 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사 차호를 사용하다보면
같은 차라도 사용하는 차호의 크기나 니료에 따라 차 맛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떤 니료의 차호에 어떤 차를 우려야 한다는 정설은 없다.
본인의 느낌 따라서 우리다보면 차와 궁합이 잘 맞는 차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부 차인들 가운데는 유명 작가의 고가품만을 고집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유명 작가의 작품은 예술품으로 소장할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평소 차를 우리는 차호라면 일반적인 자사호로 충분하다고 본다.
꼭 유명작가의 작품이나 고가품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흥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유명 작가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진정한 도공(陶工)의 혼(魂)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는 한국 도공들의 의식 수준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차 그릇을 애기하다 보니 문득 돌아가신 토우 선생님이 그립다.
80년대 중반 해인사 다경원(茶爐經卷) 소임을 보면서 토우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종종 다기 구하러 갔었는데, 그 당시 다기 한 벌에 2만원이었다.
누가 가든, 얼마를 사든, 다구 값이 몇 년 동안 그 값이었다.
그래서 가져다 파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해인사 스님들이 단골 고객이었다.
누가 다구 가격에 대해서 물으면, 토우 선생 왈:
“흙으로 만든 건데 2만이면 됐지요. 대부분 스님들이 가져가시는데.......”
한번은 내가 그져 별 생각 없이:
“선생님 다구 절수(切水)가 잘 안되는데 물대를 좀 개량하면 어떨까요?”
토우 선생 왈:
“그림은 화가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리는 것이지 남이 어찌 그리란다고 그렇게 그리진 않지요”
훗날 지인을 통해서 애기를 듣고 그 분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현대 차인 1세대라고 할 만한 효당 .금당. 토우선생 등
몇 분이 우리 차 문화 부흥을 위해서 애를 쓰셨는데
그 당시에는 변변한 한국 다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우선생께서 고심 끝에 약탕관을 모델로 삼아
만든 다구가 우리나라 현대 다구의 출발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어찌 자사호 애기를 하다말고.......
3. 차(茶)는 차일뿐이고 호(壺)는 호일뿐이다.
제발 “얼마짜리” “몇 년짜리” 이런 소리 좀 안 듣고
그 져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그렇게 차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가족들과 둘러앉아서, 벗이 오면 벗과 더불어서,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서,
그렇게 차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마실 때만이라도
"차 마시는 이놈이 어떤 놈인고?" 하고
참 주인공을 찾아보면 얼마나 좋을꼬.......
선방(禪房)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三惡道)를 면한다고 들었는데
차 한 잔만 제대로 마실 줄 알아도 삼악도는 면할 텐데
그리 믿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꼬........
요즘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차나 한 잔 하면서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 주위를 살펴서 자성(自省)의 계기로 삼으려 썼는데
어찌 쓰다 보니 황설 수설 알음알이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이 모양다리(相)에 집착하지 않고,
제대로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지.........
실은 저도 직업병인지, 아직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8년 4월 24일
북경 초의다실에서 감야(甘也)
2008년 8월 5일 화요일
보이차 역사
◈ 상고시대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운남에 살던 복족 사람들은 차를 심었고 차 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시초이다. 문헌에는 복족 사람들이 상왕(商王)에게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나라때 이미 복족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촉(蜀)의 군대를 전부 얻었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모두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파촉지사(巴蜀之師)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사람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운남은 차의 고향이며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 사람들이 이미 차엽을 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당시에는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것은 상주시기에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것과 일치한다.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보면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에게 인장을 하사하였으며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을 다스렸다. 삼국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다(茶)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선(選)이라고 부르며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산릉선에서 난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따서 말리운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다(茶)자는 글자의 뜻에 따르면 곧 차잎이어서 운남이 한(漢)나라 시기에 차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선사하였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고있다. '다산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고 다섯산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사자로 선사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제사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諸葛) 공명(孔明)으로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러 지금의 운남성 서쌍판납자치주, 맹해현의 남유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중에서 일찍 5월에 노수(지금의 금사강)을 건너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곧 진남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의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하나인 소수민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를 보면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선한 것이어서 이민족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것들은 원래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보이차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을 때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반작이 외교사절로 운남의 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만서(蠻書)]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지역의 여러 산에서 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 는 기재가 있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은 지금의 운남성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가 생산되었고 또 5백여리 거리밖으로 판매 공급되어서 이해 부근의 몽사 지금 운남성의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마신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엽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업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은생성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엽 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로 부터 은생성의 차는 마땅히 운남의 대엽종차의 종류이여야 했다. 그것은 대엽종차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의 종자이고 보이차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에서 나는 차엽은 당연히 보이차의 선조이어야 한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는 같아서 당나라때 은생성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길'이라고 교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 책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엽은 고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때부터 시작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당,송시기의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 역사의 가도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엽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외에 더욱 중요한점은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차엽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거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수 있으며,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움직일수 없는증거가 된다.
◈ 송대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말과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도로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남쪽끝의 이무진(易武鎭)으로 부터 북쪽으로 가서 보이진을 거치고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그러한 운남지 경내를 지나는 것을 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다시 석고진으로부터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차의길 주변에는 많은 성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엽의 제일 중요한 집산중심지로 개척 되었고, 점점 상인들로 하여금 운남차엽과 보이부가 상인들에 의해 밀접한 관계를 맺으므로써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경내의 키큰 차나무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의 제품은 모두 보이차라고 통칭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 원대
원(元)나라는 중국차 문화의 전수, 계승의 기복, 전환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의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말하면 원나라는 중요한 시기이다. 관습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로 선사하였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는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올라가면 어느 그루 차나무의 차잎인가에는 관계없이 운남대엽종차종자의 후대일 것이며 다시 말하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는데 그 실물은 있으나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부터 그 진짜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로 되었다.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때부터 진짜이름으로 역사에 써넣을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러서 다시 보이차의 이름에 근거를 얻게 하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 이지역에서 시장매매하는 필수상품 이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이 때부터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의 사조제는 그의 진략중 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보차의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이는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는 그가 쓴 원고 중에서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가 기원 1664년에 출판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서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것을 참고 할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인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시키라 하고 1391년에는 용단(전문적으로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바치라고 하는 최상품 차를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 순수하고 소박한 사회적 민풍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만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이 운남에서 발생되어서 운남과 서역 사이를 빈번하게 대상들이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왔으며. 교환한 차잎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운송하였다.
◈ 청대
청의 보이차는 많은 변화를 겪으며 귀중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공다(貢茶)로서 황실의 총애를 배로 받는 최상품차로 되어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부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공다는 보이현 서문산 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수도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 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 보이다고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는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되었으며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보이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거의 200년 동안 마셔왔다.청의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제일 진하며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다고 기록하였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의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 자연히 보이차를 만드는 상점이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등 차가게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최고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다산을 드나 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다산의 차의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다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 현대
중화민국(民國)이 건립되면서 본래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를 재정비하고 지난날의 위풍을 회복 할 수 있었는데, 처음 운남성 정부에서는 차잎에 대하여 정부가 관리하고 민간에서 경영한다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지방정부에서 관리를 배치하고 세금을 받게 하였으며 차상인 들이 가게를 차리고 차를 만들게 하고 민간에 운송하여 판매하게 하였다. 이것은 보이차의 생산, 판매, 경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수한 보이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중에 있다.
◈ 역대 보이명차
유명생산지로는 운남성 일대이며 특히 운남 서쌍판납의 6대다산 에서 생산된 차가 유명하다. 우량품종으로 운남 대엽종이 이용되며 신선한 잎을 채취하여 살청 하고 비빈 후 퇴적하여 곰팡이 균을 이용해 발효 가공하거나 다시 증기로 쪄서 압력을 주어 재 가공한 긴압차가 있다. 긴압차의 형태로는 사발 모양의 타차, 버섯모양의 긴차, 원형인 병차와 칠자병차, 벽돌모양의 전차가 있다. 현재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가장 오래된 청대의 금과공다가 있고 최근에는 쉽게 접 할 수는 없지만 일부 수장가들에 의해 보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역대 보이 명차들이 있다.
◇ 금과공다(金瓜貢茶)
'여름에는 용정을 마시고 겨울에는 보이를 마신다'는 궁전 속담이 있듯, 청대의 최상품차는 보이차였다. 최상품 차로서의 보이차는 모두 어린 새싹의 여아차(女兒茶)로 만들어지는데, 여아차란 이족(夷族)의 미혼소녀들이 딴 아차(芽茶)를 먼저 옷속에 넣은 다음 일정한 수량으로 쌓인 후 대나무 광주리에 꺼내 놓는 차를 말한다. 여아차로 크기가 서로 다른 대, 중, 소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는데, 큰 것은 사람의 머리모양 같아서 인두차(人頭茶)라고도 불리어졌다. 1963년 북경고궁에는 청나라시대 만들어진 2톤 남짓의 보이공다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보존이 아주 잘되어 변질되지 않았으며, 약간을 끓여보니 탕색이 있고 차의맛이 깊고 담백하다고 하였다. 중국정부는 많은 보이공다를 부순후 기타 다른 보이차속에 섞어 팔았는데 비교적 큰 금과형 공다를 유일하게 남겨서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보존하였다. 이 금과공다는 다청이 굵고 단단하며 약 100년 전후가 된 차이다.
◇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
청 중기 보이차는 이무산(易武山)과 의방다산(倚邦茶山)의 차 품종이 으뜸이었다. 의방다산은 보이공차를 만드는 소엽종의 차이고 이무산은 오래 묵을수록 향기로운 대엽종 보이차의 품종이었다. 광서(光緖)중기 이무진과 의방다구 사이로 도로가 연결되어 이시기 차를 파는 상인들은 대부분 두 곳의 차산지에 동시에 차 공장을 설치하였다. 광서(光緖)초년에 창설된 원창호 역시 광서 중기 이무 큰 거리에 차 공장 분점을 개설하고 복원창호 차가게라고 이름짓고 이무산의 대엽종 보이차엽을 전문적으로 사용하여 정선하여 만든 제품을 제조하여 국내와 해외에 판매 하였다. 그러나 광서 말년 운남 남부의 모든 차가게와 차공장이 지방의 치안부재와 질병유행으로 휴업하였는데 의방의 원창호와 이무의 복원창호도 마찬가지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원창호는 폐업하고 이무의 복원창호는 민국 10년 전후에 다시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복원창원차는 광서년간에 제조한 백년전 보이차로 제일 우수한 대엽종 보이차청을 채취하여 만들어 차엽이 두텁고 크며 가지가 넓고 엷으며 밤색에 차기(茶氣)는 강하여 이무산 보이차의 특성을 충분히 가졌는데 남색 내비로 포장된 차는 비교적 양기(陽氣)가 강하며 백색 내비로 된 차는 여리고 부드럽다. 현재는 당시의 원창호 보이차는 볼수 없고 복원창호 보이원차가 남아서 일부 수장가에게 보관되고 있다.
◇ 동경원차(同慶圓茶)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치하였는데 공장규모가 크고 산량도 아주 많았으며, 그 역사도 오래되어 200여년을 자랑하였다. 동경노호로 대표되는 용마(龍馬)상표의 내표, 내비는 200년을 사용한 후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그 후 중국정부가 운남의 모든 차가게를 국유화 시킬때 휴업을 하였다. 동경호차가게의 보이차는 당시 품질이 가장 좋은차로 알려졌다. 동경노호의 용마상표 원다는 종류가 많았는데 시장에서 살수 있는 제품들은 제일 오래된 2.3종의 보이차 제품중 하나이며 그 차의 햇수는 근 100년에 가깝기 때문에 차를 파는 상인들한테서 청말기 국보급의 백년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동경노호원차는 매 하나의 통마다 죽순껍질 포장이 되어 있는데 이런 죽순껍질은 운남의 큰 대나무의 죽순줄기 겉껍데기에서 생산된다. 운남은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가 굵고 단단하며 죽순과 죽순껍질이 크면서 인성이 특히 강하다. 또한 죽순껍질의 섬유는 강인하고 내구력이 있어 못쓰게 되거나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으며 동시에 습기를 방지하고 잡 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어 보이차를 포장하는데 제일 적당한 재료로 근 100년이 된 보이차지만 완전하게 보관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 경창원차(敬昌圓茶)
경창원차(경창호)는 만새다산의 제일 좋은 차잎을 채집하여 만들고, 대엽종 차나무이며 가지는 비대하고 차잎의 크기는 넓고 크며 기름지고 황금빛의 솜털이 있다. 만새다산은 라오스 변경에 위치하는데 차의성질은 이무다산 다음이다. 모든 민간 차 가게들은 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원차(경창호)의 제조공정과 기술이 가정 정교하고 우수하다고 추천한다. 병차의 직경이 20.5cm 이며 무게는 약 330g으로 녹나무 향기가 나고 보이차 제품중 가장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민국 30년대 제품이다.
◇ 강성원차(江城圓茶)
강성원차(강성호)는 강성현의 보이차 제품으로 대표적인 강성의 보이차로 경창원차와 강성호 보이원차가 있다. 직경 19.5cm, 무게 약 320g으로 가지는 납짝하고 길며 빛깔은 밤색이 나는 황색이고 차청은 반지르하다. 대엽종이며 약한 녹나무향이다. 경창원차의 자매차로 민국 3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고, 마시면 느낌이 새롭고 그 내표의 그림과 문자에 오성이 그려져 있거나 "포장을 참답게 하고 경제를 번영 시키자" 는 어구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적 색채를 보아 5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다.
◇ 양빙원차(楊聘圓茶)
양빙호(楊聘號) 차가계는 대략 민국10년 의방진의 큰 거리에서 개점하였다. 그러나 언제 폐점 했는지는 자료가 없고 다만 10여개의 원차만이 남아 있어 양빙호 차가게의 역사적 증거물이 되었다. 직경 19cm, 무게 약 280g 이며 매 병(餠) 마다 5 x 6.8cm의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된 문자 속에는 양빙호등 33자가 적혀 있다. 병차의 표면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으며 누른 싹이 반지르르 하다. 차탕은 맑고 담박하고 약간 신맛이 나서 전형적인 의방 소엽종 보이차의 특성을 지닌다.
◇ 동흥원차(同興圓茶)
동흥호(同興號)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동흥초기원차로써 민국10년부터 23년 사이의 제품이고, 다른 한가지는 동흥 후기원차로써 민국 23년부터 38년 사이의 제품이다. 두가지 모두 의방다산의 차제품이며 차공장에서 나온 기간이 근 20년 간의 차이가 나지만 두 가지 차의 성질이 서로 같아서 동흥호 차가게의 상품관리가 아주 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창원차(同昌圓茶)
동창호(同昌號)는 1869년에 창립되어 청나라 말기에 폐업하였다. 그후 상인인 황문흥(黃文興)이 차가게를 인수받아 운영하였는데, 동창호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다가 민국 38년에 동창황기(同昌黃記)로 바뀌면서 주인인 황문흥도 황금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문흥의 동창원차, 동창황기람(藍)원차, 동창황기홍(紅)원차가 있다.
◇ 정흥원차(鼎興圓茶)
정흥호(鼎興號)의 차가게는 고급 보이차를 생산하여 유명하였다. 현재 이 가게의 남겨져 있는 제품은 많지 않다 원차 세 가지와 긴압차가 있는데, 원차는 내비의 색깔로 구분한다. 원차의 내비 색깔은 붉은색, 남색, 자색의 서로 다른 세 가지 글자색인데 붉은 색과 남색의 글자로 된 내지가 있는 두 가지 원차는 품질이 비슷하며, 경미하게 익힌 차청으로 야성(野性)의 녹나무 향이 있고, 보이차 중 가장 진한 차 향기를 지닌 맹해 주위의 소엽종 다원에서 나온 것으로 유락산남산(諛樂山南山)기슭 일대의 소엽종 차청이다. 자색의 글자로 된 내비가 있는 것은 원차의 품질이 앞의 두가지 차보다 떨어진다. 정흥원차는 맛이 담백하고 약간 신맛을 띠고 차찌꺼기, 수성(水性)으로 볼 때 의방보이차의 특색으로 볼 수 있다.
◇ 정흥긴차(鼎興緊茶)
불해(佛海)지구의 정흥차 가게에서 생산한 것으로, 불해는 지금의 보이차 생산 중심인 맹해이고 정흥 차가게는 1949년전의 상회이며 운남에서 명성이 있었고 지금도 이 차가게에서 만들었던 좋은 원차들이 남아 있다. 긴차의 표기에는 별과달의 그림이 있고 당시 생산된 제품은 서북성에 운반되어 이슬람교의 변강 민족에게 팔렸고 동시에 영문으로 써서 먼 중동의 회교도 국가에까지 운반되었다. 탕색은 짙은 밤색이며 차가루가 얼마간 있어 차를 우려 마실 때는 여과 시켜야 한다. 수성이 순수하고 두터우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감각이 있고, 찻물이 입에 들어가면 두텁고 유순하며 짙고 매끌매끌하며 순수하고 달콤하며 상쾌하다. 차향은 침향 향기가 짙고 그 속에 담박한 녹나무향기가 있다.
◇ 맹경긴차(맹景緊茶)
맹경긴차는 맹농(맹弄)지방의 맹경 차가게에서 생산한 제품이다. 맹농은 운남성 보이진(鎭)의 동북방향에 있는 맹농촌 인데 맹고(맹庫), 봉산(鳳山)과 더불어 운남성 중부의 차산지이다. 맹경긴차는 늙은 차나무의 쇄청한 생엽 으로 만들며 건조한 창고에서 오랫동안 저장한 것으로 차 덩어리는 이미 말라 터져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되었고 어떤 것은 껍질이 말라 떨어져 있다. 무게는 200g정도이고, 우려내면 향기롭고 잡냄새가 없으나 늙은 차청이라서 오랫동안 우려 낼수는 없다. 탕색은 붉은 밤색이며, 비교적 가루가 많아 우려 낼 때 여과시켜야 한다.
◇ 반선긴차(班禪緊茶)
대리(大理)하관에 차 공장을 건설한 주요 원인은 보이차를 티베트등 서역 지구에 운반하여 판매하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차 마시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어 있는데 순수하고 짙은맛이 나며 강한 생긴차(生緊茶)가 그들의 식 습관과 어울렸다. 그러나 70년대 쾌속 발효제다 공정의 연구가 성공한 뒤로 그러한 맛의 보이차 맛을 잃어 버렸는데 1980년 10월 20일 티벳 종교 지도자 반선이 친히 하관의 차공장에 와서 참관하고 옛 보이차 맛을 아쉬워 하자 하관 차공장에서 반선을 위해 한차례의 생긴차를 제조하여 '보염패(寶焰牌)'라는 내비를 붙여 생산하였다. 티벳 외의 대외 판매는 하지 않았으나, 몇 년 지난 후 재고품이 소량 남아 있다가 일부 수장가들에게 판매 되었다. 반선긴차는 새 차나무 관목의 2급 아래 차청을 사용하였고 차 덩어리가 매우 단단하며 덩어리 표면은 짙은 밤색이고 속은 푸른 밤색이다. 푸른잎의 향기를 보존하였고 수성이 엷고 날카로우며 쓰고 떫은 전형적인 생보이차의 제품이다. 나중에 티벳트 지역의 요구에 따라 80년대말에 「운남성차수출입공사」하관 차공장에서 육속 화염패(火焰牌) 반선긴차를 제다하여 서북지구에 공급하였고 현재 하관 차공장에서 일정한 수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 가이흥전차(可以興茶)
1926년에서 1941년 사이의 차 가게로써 현재 보이전차만이 남아 있다. 가이흥전차(可以興茶)의 의의는 전차의 무게가 10량전 이라는 실물의 표본이며, 보이차청으로 이름난 이무다산과 불해다산중 보드랍고 검은 가지를 지닌 최상의 불해 보이차청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보이전차의 역사를 1967년부터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가이흥호 전차를 보면 초기에도 전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홍인(紅印)
1940년대에 범화균(范和鈞)선생이 중국다업공사에 초빙되어 맹해에 차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간에서 차청을 사들여 몇 가지 보이차를 시험 제다 하여 성공하였는데, 그중 홍인보이원차가 있다. 홍인은 글자 그대로 붉은 인기(印記)이다. 차 덩이의 겉면 종이 정면에 '8중차(8中茶)의 중차공사(中茶公司) 표지가 찍혀있고 가운데 붉은 색으로 된차(茶)자가 찍혀 있어 이후 속칭으로 홍인 이라 불리었다. 홍인보이원차는 범화균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맹해 일대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200여년의 보이 최상품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정세의 불안정과 중국인민공화국의 건립으로 숙원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사실상 현대 보이 최상품차이다. 홍인은 1940년대 만들어진 초기홍인과 1950년대 만들어진 후기 홍인이 있다. 초기홍인은 어린 차청을 사용하였으며 난초 향기가 있고, 후기홍인은 중장년급의 차청으로 만들었으며 짙은 녹나무 향기가 있다.
◇ 녹인(綠印)
녹인보이는 홍인보이와 마찬가지로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 표기의 가운데 찍힌 차(茶)자가 녹색이라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홍인의 자매 제품으로 40년대 초기녹인과 50년대 후기녹인의 두 가지가 있는데. 범화균 선생이 맹랍지방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홍인을 만들고 다시 맹해 부근의 좋은 차청을 사들여 녹인을 제다 하였다. 초기녹인을 '홍인갑을원차' 혹은 '갑을녹인'이라고도 하는데 초기홍인 보다는 그 맛이 떨어지나 후기홍인 보다는 부드럽고 떫지도 않다. 후기녹인은 '포장지 없는 녹인' '대자녹인(大字綠印)' '소자녹인(小字綠印)'등 세 가지이다.
◇ 황인(黃印)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 이외에 중차패 표지 가운데 차(茶)자가 황색인 제품이 있었는데 이것이 황인원차 이다. 덩어리가 큰 대황인과 덩어리가 작은 소황인이 있다. 황인은 현재 칠자보이병차의 전신인며 배합차청 보이차 제품의 시작으로 제다 과정 중에서 상당한 정도의 발효 효과를 내며, 덩어리를 단단하게 압축하였다.
◇ 원차철병(圓茶鐵餠)
50년대 초 중국 차엽 회사에서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판매를 확대하는 계획을 세워 차 교역을 확대하게 되자 하관 차 공장에서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공장 건설을 증축하였고 전통적인 보이차 압조 기술을 개선 하기 위하여 전부가 금속으로 만든 압축 모형을 설계하여 개량하였다. 이 새로운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특별히 맹해 차 공장의 차청을 가져다가 처음으로 원차원반을 압축 제조하였다. 그러나 이 원차원반은 덩어리가 너무 단단하여 쉽게 발효되지 않아 이후 새로운 금속모형의 생산을 중지하였고 이 때 생산된 원차원반은 하관 차공장의 전무후무한 원차원반 제품이 되었다. 같은 년대의 다른 차보다 발효 속도가 느려 새로운 맛이 나며 신선하고 달콤하며, 향기는 맑은 녹나무 향기가 난다. 건조한 창고에서 변질되지 않은 것은 차 덩어리 표면이 고르게 금황색을 띠고 반들반들 윤이 나며 차 덩어리의 가장자리는 일부분이 떨어져서 울퉁불퉁 하다. 변질된 차는 표면이 어둡고 진한 색이고 반들거림이 부족하며 차 덩어리가 평평하고 가장자리가 균일하고 단단하며 두텁고 덩어리를 쪼개어보면 속층에 검고 푸른곰팡이가 있다. 덩어리가 느슨한 편이고 검은 밤색이 나며 깨져 떨어져 있는 것은 습기찬 창고에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 칠자철병(七子鐵餠)
'칠자원반'이라고도 하며 60년대 초기 곤명 차 공장에서 천주머니로 된 압축 모형 기계를 바꾸어 하관의 원차원반처럼 전부 금속으로 된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칠자원반보이차'를 압축 제조하였다. 칠자원반은 내비와 통포장이 없으며, 차청은 곤명 일대의 차청으로 추정되고 차 찌꺼기로 보아 중장기에 속하며 품질은 좋고 차의 가지는 길고 가늘고, 균일하며 생차 제다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탕색은 검은색이고 수성은 두텁고 매끌매끌하며 뒷맛이 달고 물맛이 짙으며 차의 기는 강하고 담박한 녹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운남에 살던 복족 사람들은 차를 심었고 차 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시초이다. 문헌에는 복족 사람들이 상왕(商王)에게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나라때 이미 복족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촉(蜀)의 군대를 전부 얻었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모두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파촉지사(巴蜀之師)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사람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운남은 차의 고향이며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 사람들이 이미 차엽을 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당시에는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것은 상주시기에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것과 일치한다.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보면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에게 인장을 하사하였으며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을 다스렸다. 삼국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다(茶)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선(選)이라고 부르며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산릉선에서 난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따서 말리운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다(茶)자는 글자의 뜻에 따르면 곧 차잎이어서 운남이 한(漢)나라 시기에 차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선사하였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고있다. '다산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고 다섯산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사자로 선사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제사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諸葛) 공명(孔明)으로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러 지금의 운남성 서쌍판납자치주, 맹해현의 남유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중에서 일찍 5월에 노수(지금의 금사강)을 건너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곧 진남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의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하나인 소수민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를 보면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선한 것이어서 이민족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것들은 원래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보이차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을 때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반작이 외교사절로 운남의 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만서(蠻書)]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지역의 여러 산에서 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 는 기재가 있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은 지금의 운남성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가 생산되었고 또 5백여리 거리밖으로 판매 공급되어서 이해 부근의 몽사 지금 운남성의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마신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엽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업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은생성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엽 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로 부터 은생성의 차는 마땅히 운남의 대엽종차의 종류이여야 했다. 그것은 대엽종차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의 종자이고 보이차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에서 나는 차엽은 당연히 보이차의 선조이어야 한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는 같아서 당나라때 은생성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길'이라고 교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 책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엽은 고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때부터 시작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당,송시기의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 역사의 가도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엽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외에 더욱 중요한점은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차엽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거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수 있으며,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움직일수 없는증거가 된다.
◈ 송대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말과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도로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남쪽끝의 이무진(易武鎭)으로 부터 북쪽으로 가서 보이진을 거치고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그러한 운남지 경내를 지나는 것을 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다시 석고진으로부터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차의길 주변에는 많은 성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엽의 제일 중요한 집산중심지로 개척 되었고, 점점 상인들로 하여금 운남차엽과 보이부가 상인들에 의해 밀접한 관계를 맺으므로써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경내의 키큰 차나무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의 제품은 모두 보이차라고 통칭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 원대
원(元)나라는 중국차 문화의 전수, 계승의 기복, 전환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의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말하면 원나라는 중요한 시기이다. 관습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로 선사하였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는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올라가면 어느 그루 차나무의 차잎인가에는 관계없이 운남대엽종차종자의 후대일 것이며 다시 말하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는데 그 실물은 있으나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부터 그 진짜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로 되었다.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때부터 진짜이름으로 역사에 써넣을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러서 다시 보이차의 이름에 근거를 얻게 하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 이지역에서 시장매매하는 필수상품 이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이 때부터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의 사조제는 그의 진략중 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보차의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이는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는 그가 쓴 원고 중에서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가 기원 1664년에 출판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서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것을 참고 할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인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시키라 하고 1391년에는 용단(전문적으로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바치라고 하는 최상품 차를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 순수하고 소박한 사회적 민풍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만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이 운남에서 발생되어서 운남과 서역 사이를 빈번하게 대상들이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왔으며. 교환한 차잎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운송하였다.
◈ 청대
청의 보이차는 많은 변화를 겪으며 귀중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공다(貢茶)로서 황실의 총애를 배로 받는 최상품차로 되어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부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공다는 보이현 서문산 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수도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 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 보이다고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는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되었으며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보이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거의 200년 동안 마셔왔다.청의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제일 진하며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다고 기록하였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의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 자연히 보이차를 만드는 상점이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등 차가게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최고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다산을 드나 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다산의 차의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다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 현대
중화민국(民國)이 건립되면서 본래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를 재정비하고 지난날의 위풍을 회복 할 수 있었는데, 처음 운남성 정부에서는 차잎에 대하여 정부가 관리하고 민간에서 경영한다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지방정부에서 관리를 배치하고 세금을 받게 하였으며 차상인 들이 가게를 차리고 차를 만들게 하고 민간에 운송하여 판매하게 하였다. 이것은 보이차의 생산, 판매, 경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수한 보이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중에 있다.
◈ 역대 보이명차
유명생산지로는 운남성 일대이며 특히 운남 서쌍판납의 6대다산 에서 생산된 차가 유명하다. 우량품종으로 운남 대엽종이 이용되며 신선한 잎을 채취하여 살청 하고 비빈 후 퇴적하여 곰팡이 균을 이용해 발효 가공하거나 다시 증기로 쪄서 압력을 주어 재 가공한 긴압차가 있다. 긴압차의 형태로는 사발 모양의 타차, 버섯모양의 긴차, 원형인 병차와 칠자병차, 벽돌모양의 전차가 있다. 현재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가장 오래된 청대의 금과공다가 있고 최근에는 쉽게 접 할 수는 없지만 일부 수장가들에 의해 보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역대 보이 명차들이 있다.
◇ 금과공다(金瓜貢茶)
'여름에는 용정을 마시고 겨울에는 보이를 마신다'는 궁전 속담이 있듯, 청대의 최상품차는 보이차였다. 최상품 차로서의 보이차는 모두 어린 새싹의 여아차(女兒茶)로 만들어지는데, 여아차란 이족(夷族)의 미혼소녀들이 딴 아차(芽茶)를 먼저 옷속에 넣은 다음 일정한 수량으로 쌓인 후 대나무 광주리에 꺼내 놓는 차를 말한다. 여아차로 크기가 서로 다른 대, 중, 소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는데, 큰 것은 사람의 머리모양 같아서 인두차(人頭茶)라고도 불리어졌다. 1963년 북경고궁에는 청나라시대 만들어진 2톤 남짓의 보이공다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보존이 아주 잘되어 변질되지 않았으며, 약간을 끓여보니 탕색이 있고 차의맛이 깊고 담백하다고 하였다. 중국정부는 많은 보이공다를 부순후 기타 다른 보이차속에 섞어 팔았는데 비교적 큰 금과형 공다를 유일하게 남겨서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에 보존하였다. 이 금과공다는 다청이 굵고 단단하며 약 100년 전후가 된 차이다.
◇ 복원창원차(福元昌圓茶)
청 중기 보이차는 이무산(易武山)과 의방다산(倚邦茶山)의 차 품종이 으뜸이었다. 의방다산은 보이공차를 만드는 소엽종의 차이고 이무산은 오래 묵을수록 향기로운 대엽종 보이차의 품종이었다. 광서(光緖)중기 이무진과 의방다구 사이로 도로가 연결되어 이시기 차를 파는 상인들은 대부분 두 곳의 차산지에 동시에 차 공장을 설치하였다. 광서(光緖)초년에 창설된 원창호 역시 광서 중기 이무 큰 거리에 차 공장 분점을 개설하고 복원창호 차가게라고 이름짓고 이무산의 대엽종 보이차엽을 전문적으로 사용하여 정선하여 만든 제품을 제조하여 국내와 해외에 판매 하였다. 그러나 광서 말년 운남 남부의 모든 차가게와 차공장이 지방의 치안부재와 질병유행으로 휴업하였는데 의방의 원창호와 이무의 복원창호도 마찬가지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원창호는 폐업하고 이무의 복원창호는 민국 10년 전후에 다시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복원창원차는 광서년간에 제조한 백년전 보이차로 제일 우수한 대엽종 보이차청을 채취하여 만들어 차엽이 두텁고 크며 가지가 넓고 엷으며 밤색에 차기(茶氣)는 강하여 이무산 보이차의 특성을 충분히 가졌는데 남색 내비로 포장된 차는 비교적 양기(陽氣)가 강하며 백색 내비로 된 차는 여리고 부드럽다. 현재는 당시의 원창호 보이차는 볼수 없고 복원창호 보이원차가 남아서 일부 수장가에게 보관되고 있다.
◇ 동경원차(同慶圓茶)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치하였는데 공장규모가 크고 산량도 아주 많았으며, 그 역사도 오래되어 200여년을 자랑하였다. 동경노호로 대표되는 용마(龍馬)상표의 내표, 내비는 200년을 사용한 후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그 후 중국정부가 운남의 모든 차가게를 국유화 시킬때 휴업을 하였다. 동경호차가게의 보이차는 당시 품질이 가장 좋은차로 알려졌다. 동경노호의 용마상표 원다는 종류가 많았는데 시장에서 살수 있는 제품들은 제일 오래된 2.3종의 보이차 제품중 하나이며 그 차의 햇수는 근 100년에 가깝기 때문에 차를 파는 상인들한테서 청말기 국보급의 백년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동경노호원차는 매 하나의 통마다 죽순껍질 포장이 되어 있는데 이런 죽순껍질은 운남의 큰 대나무의 죽순줄기 겉껍데기에서 생산된다. 운남은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가 굵고 단단하며 죽순과 죽순껍질이 크면서 인성이 특히 강하다. 또한 죽순껍질의 섬유는 강인하고 내구력이 있어 못쓰게 되거나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으며 동시에 습기를 방지하고 잡 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어 보이차를 포장하는데 제일 적당한 재료로 근 100년이 된 보이차지만 완전하게 보관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 경창원차(敬昌圓茶)
경창원차(경창호)는 만새다산의 제일 좋은 차잎을 채집하여 만들고, 대엽종 차나무이며 가지는 비대하고 차잎의 크기는 넓고 크며 기름지고 황금빛의 솜털이 있다. 만새다산은 라오스 변경에 위치하는데 차의성질은 이무다산 다음이다. 모든 민간 차 가게들은 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원차(경창호)의 제조공정과 기술이 가정 정교하고 우수하다고 추천한다. 병차의 직경이 20.5cm 이며 무게는 약 330g으로 녹나무 향기가 나고 보이차 제품중 가장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민국 30년대 제품이다.
◇ 강성원차(江城圓茶)
강성원차(강성호)는 강성현의 보이차 제품으로 대표적인 강성의 보이차로 경창원차와 강성호 보이원차가 있다. 직경 19.5cm, 무게 약 320g으로 가지는 납짝하고 길며 빛깔은 밤색이 나는 황색이고 차청은 반지르하다. 대엽종이며 약한 녹나무향이다. 경창원차의 자매차로 민국 3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고, 마시면 느낌이 새롭고 그 내표의 그림과 문자에 오성이 그려져 있거나 "포장을 참답게 하고 경제를 번영 시키자" 는 어구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적 색채를 보아 50년대 제품이라는 평가도 있다.
◇ 양빙원차(楊聘圓茶)
양빙호(楊聘號) 차가계는 대략 민국10년 의방진의 큰 거리에서 개점하였다. 그러나 언제 폐점 했는지는 자료가 없고 다만 10여개의 원차만이 남아 있어 양빙호 차가게의 역사적 증거물이 되었다. 직경 19cm, 무게 약 280g 이며 매 병(餠) 마다 5 x 6.8cm의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된 문자 속에는 양빙호등 33자가 적혀 있다. 병차의 표면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으며 누른 싹이 반지르르 하다. 차탕은 맑고 담박하고 약간 신맛이 나서 전형적인 의방 소엽종 보이차의 특성을 지닌다.
◇ 동흥원차(同興圓茶)
동흥호(同興號)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동흥초기원차로써 민국10년부터 23년 사이의 제품이고, 다른 한가지는 동흥 후기원차로써 민국 23년부터 38년 사이의 제품이다. 두가지 모두 의방다산의 차제품이며 차공장에서 나온 기간이 근 20년 간의 차이가 나지만 두 가지 차의 성질이 서로 같아서 동흥호 차가게의 상품관리가 아주 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창원차(同昌圓茶)
동창호(同昌號)는 1869년에 창립되어 청나라 말기에 폐업하였다. 그후 상인인 황문흥(黃文興)이 차가게를 인수받아 운영하였는데, 동창호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다가 민국 38년에 동창황기(同昌黃記)로 바뀌면서 주인인 황문흥도 황금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문흥의 동창원차, 동창황기람(藍)원차, 동창황기홍(紅)원차가 있다.
◇ 정흥원차(鼎興圓茶)
정흥호(鼎興號)의 차가게는 고급 보이차를 생산하여 유명하였다. 현재 이 가게의 남겨져 있는 제품은 많지 않다 원차 세 가지와 긴압차가 있는데, 원차는 내비의 색깔로 구분한다. 원차의 내비 색깔은 붉은색, 남색, 자색의 서로 다른 세 가지 글자색인데 붉은 색과 남색의 글자로 된 내지가 있는 두 가지 원차는 품질이 비슷하며, 경미하게 익힌 차청으로 야성(野性)의 녹나무 향이 있고, 보이차 중 가장 진한 차 향기를 지닌 맹해 주위의 소엽종 다원에서 나온 것으로 유락산남산(諛樂山南山)기슭 일대의 소엽종 차청이다. 자색의 글자로 된 내비가 있는 것은 원차의 품질이 앞의 두가지 차보다 떨어진다. 정흥원차는 맛이 담백하고 약간 신맛을 띠고 차찌꺼기, 수성(水性)으로 볼 때 의방보이차의 특색으로 볼 수 있다.
◇ 정흥긴차(鼎興緊茶)
불해(佛海)지구의 정흥차 가게에서 생산한 것으로, 불해는 지금의 보이차 생산 중심인 맹해이고 정흥 차가게는 1949년전의 상회이며 운남에서 명성이 있었고 지금도 이 차가게에서 만들었던 좋은 원차들이 남아 있다. 긴차의 표기에는 별과달의 그림이 있고 당시 생산된 제품은 서북성에 운반되어 이슬람교의 변강 민족에게 팔렸고 동시에 영문으로 써서 먼 중동의 회교도 국가에까지 운반되었다. 탕색은 짙은 밤색이며 차가루가 얼마간 있어 차를 우려 마실 때는 여과 시켜야 한다. 수성이 순수하고 두터우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감각이 있고, 찻물이 입에 들어가면 두텁고 유순하며 짙고 매끌매끌하며 순수하고 달콤하며 상쾌하다. 차향은 침향 향기가 짙고 그 속에 담박한 녹나무향기가 있다.
◇ 맹경긴차(맹景緊茶)
맹경긴차는 맹농(맹弄)지방의 맹경 차가게에서 생산한 제품이다. 맹농은 운남성 보이진(鎭)의 동북방향에 있는 맹농촌 인데 맹고(맹庫), 봉산(鳳山)과 더불어 운남성 중부의 차산지이다. 맹경긴차는 늙은 차나무의 쇄청한 생엽 으로 만들며 건조한 창고에서 오랫동안 저장한 것으로 차 덩어리는 이미 말라 터져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되었고 어떤 것은 껍질이 말라 떨어져 있다. 무게는 200g정도이고, 우려내면 향기롭고 잡냄새가 없으나 늙은 차청이라서 오랫동안 우려 낼수는 없다. 탕색은 붉은 밤색이며, 비교적 가루가 많아 우려 낼 때 여과시켜야 한다.
◇ 반선긴차(班禪緊茶)
대리(大理)하관에 차 공장을 건설한 주요 원인은 보이차를 티베트등 서역 지구에 운반하여 판매하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티베트는 차 마시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어 있는데 순수하고 짙은맛이 나며 강한 생긴차(生緊茶)가 그들의 식 습관과 어울렸다. 그러나 70년대 쾌속 발효제다 공정의 연구가 성공한 뒤로 그러한 맛의 보이차 맛을 잃어 버렸는데 1980년 10월 20일 티벳 종교 지도자 반선이 친히 하관의 차공장에 와서 참관하고 옛 보이차 맛을 아쉬워 하자 하관 차공장에서 반선을 위해 한차례의 생긴차를 제조하여 '보염패(寶焰牌)'라는 내비를 붙여 생산하였다. 티벳 외의 대외 판매는 하지 않았으나, 몇 년 지난 후 재고품이 소량 남아 있다가 일부 수장가들에게 판매 되었다. 반선긴차는 새 차나무 관목의 2급 아래 차청을 사용하였고 차 덩어리가 매우 단단하며 덩어리 표면은 짙은 밤색이고 속은 푸른 밤색이다. 푸른잎의 향기를 보존하였고 수성이 엷고 날카로우며 쓰고 떫은 전형적인 생보이차의 제품이다. 나중에 티벳트 지역의 요구에 따라 80년대말에 「운남성차수출입공사」하관 차공장에서 육속 화염패(火焰牌) 반선긴차를 제다하여 서북지구에 공급하였고 현재 하관 차공장에서 일정한 수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 가이흥전차(可以興茶)
1926년에서 1941년 사이의 차 가게로써 현재 보이전차만이 남아 있다. 가이흥전차(可以興茶)의 의의는 전차의 무게가 10량전 이라는 실물의 표본이며, 보이차청으로 이름난 이무다산과 불해다산중 보드랍고 검은 가지를 지닌 최상의 불해 보이차청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보이전차의 역사를 1967년부터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가이흥호 전차를 보면 초기에도 전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홍인(紅印)
1940년대에 범화균(范和鈞)선생이 중국다업공사에 초빙되어 맹해에 차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간에서 차청을 사들여 몇 가지 보이차를 시험 제다 하여 성공하였는데, 그중 홍인보이원차가 있다. 홍인은 글자 그대로 붉은 인기(印記)이다. 차 덩이의 겉면 종이 정면에 '8중차(8中茶)의 중차공사(中茶公司) 표지가 찍혀있고 가운데 붉은 색으로 된차(茶)자가 찍혀 있어 이후 속칭으로 홍인 이라 불리었다. 홍인보이원차는 범화균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맹해 일대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200여년의 보이 최상품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정세의 불안정과 중국인민공화국의 건립으로 숙원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사실상 현대 보이 최상품차이다. 홍인은 1940년대 만들어진 초기홍인과 1950년대 만들어진 후기 홍인이 있다. 초기홍인은 어린 차청을 사용하였으며 난초 향기가 있고, 후기홍인은 중장년급의 차청으로 만들었으며 짙은 녹나무 향기가 있다.
◇ 녹인(綠印)
녹인보이는 홍인보이와 마찬가지로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 표기의 가운데 찍힌 차(茶)자가 녹색이라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홍인의 자매 제품으로 40년대 초기녹인과 50년대 후기녹인의 두 가지가 있는데. 범화균 선생이 맹랍지방의 제일 좋은 차청으로 홍인을 만들고 다시 맹해 부근의 좋은 차청을 사들여 녹인을 제다 하였다. 초기녹인을 '홍인갑을원차' 혹은 '갑을녹인'이라고도 하는데 초기홍인 보다는 그 맛이 떨어지나 후기홍인 보다는 부드럽고 떫지도 않다. 후기녹인은 '포장지 없는 녹인' '대자녹인(大字綠印)' '소자녹인(小字綠印)'등 세 가지이다.
◇ 황인(黃印)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 이외에 중차패 표지 가운데 차(茶)자가 황색인 제품이 있었는데 이것이 황인원차 이다. 덩어리가 큰 대황인과 덩어리가 작은 소황인이 있다. 황인은 현재 칠자보이병차의 전신인며 배합차청 보이차 제품의 시작으로 제다 과정 중에서 상당한 정도의 발효 효과를 내며, 덩어리를 단단하게 압축하였다.
◇ 원차철병(圓茶鐵餠)
50년대 초 중국 차엽 회사에서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판매를 확대하는 계획을 세워 차 교역을 확대하게 되자 하관 차 공장에서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공장 건설을 증축하였고 전통적인 보이차 압조 기술을 개선 하기 위하여 전부가 금속으로 만든 압축 모형을 설계하여 개량하였다. 이 새로운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특별히 맹해 차 공장의 차청을 가져다가 처음으로 원차원반을 압축 제조하였다. 그러나 이 원차원반은 덩어리가 너무 단단하여 쉽게 발효되지 않아 이후 새로운 금속모형의 생산을 중지하였고 이 때 생산된 원차원반은 하관 차공장의 전무후무한 원차원반 제품이 되었다. 같은 년대의 다른 차보다 발효 속도가 느려 새로운 맛이 나며 신선하고 달콤하며, 향기는 맑은 녹나무 향기가 난다. 건조한 창고에서 변질되지 않은 것은 차 덩어리 표면이 고르게 금황색을 띠고 반들반들 윤이 나며 차 덩어리의 가장자리는 일부분이 떨어져서 울퉁불퉁 하다. 변질된 차는 표면이 어둡고 진한 색이고 반들거림이 부족하며 차 덩어리가 평평하고 가장자리가 균일하고 단단하며 두텁고 덩어리를 쪼개어보면 속층에 검고 푸른곰팡이가 있다. 덩어리가 느슨한 편이고 검은 밤색이 나며 깨져 떨어져 있는 것은 습기찬 창고에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 칠자철병(七子鐵餠)
'칠자원반'이라고도 하며 60년대 초기 곤명 차 공장에서 천주머니로 된 압축 모형 기계를 바꾸어 하관의 원차원반처럼 전부 금속으로 된 압축 모형을 사용하여 '칠자원반보이차'를 압축 제조하였다. 칠자원반은 내비와 통포장이 없으며, 차청은 곤명 일대의 차청으로 추정되고 차 찌꺼기로 보아 중장기에 속하며 품질은 좋고 차의 가지는 길고 가늘고, 균일하며 생차 제다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탕색은 검은색이고 수성은 두텁고 매끌매끌하며 뒷맛이 달고 물맛이 짙으며 차의 기는 강하고 담박한 녹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나쁜 부이차
보이차는 원래 몸을 따뜻하게 하고, 독기를 풀며, 풍을 몰아내고, 몸을 정상적으로 돌리는데 매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차입니다.
좋은 색, 향, 맛과 더불어 좋은 기(氣)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① 좋은 차엽으로 제대로 발효가 되어야 하고, ② 좋은 상태에서 보관되어야 합니다.
위의 조건을 모두 갖춘 보이차를 "제대로 된 보이차", "정상적인 보이차" 혹은 "진정(眞正) 보이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중국, 대만, 우리나라에서 위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보이차가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보이차가 아닌 보이차를 가짜 보이차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렇게 위조품이 대량 유통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차 보이차의 경우 20년을 넘어 50년정도까지 발효시키는 것이 있는데, 이처럼 연도가 오래되면, 높은 가격을 받고 팔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보이차는 값이 말할 수 없이 비쌉니다. 동경호나 송빙호와 같은 골동차는 말할 것도 없이 조기홍인원차와 같은 인급차도 대만이나 홍콩에서 150 ~ 200만원에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짜가 대량으로 제조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만에서 동경호 500편을 조사해 봤더니 그 중 14편만이 진품이었다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보이차를 위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훨씬 싸구려 차를 가지고 껍질만 바꿔 싼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무지녹인( 이 차도 요즘엔 정말 비쌉니다.) 같은 차에 송빙호 포장을 해서 송빙호라고 파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은 아주 갓 만든 신차(신차의 가격은 한국 돈으로 몇천원밖에 하지 않습니다)를 화학처리를 거쳐서 재포장한 경우입니다. 화학적으로 위조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쓰이는 대표적인 화학제로서는 카바이트, 황산가스, 불소, 염소수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화학제를 이용해서 생차의 강한 맛과
향과 색 등을 빼버린 후 오래 묵은 듯하게 만들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썩은 보이차가 있습니다. 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악퇴 도중 썩어버린 차를 그대로 유통시키는 것입니다. 보이차 제조 과정에서 악퇴를 하다가 썩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면 그 차엽은 당연히 폐기처분을 해야하는데 그런 차들이 뒤로 돌려져서 화학처리를 한 후 좋지 않은 맛과 향을 빼고 긴압을 해서 유통되는 경우입니다.
메주를 띄우다가도 잘못 발효를 시켜서 썩어버리는 경우가 있듯이 숙차 보이차도 마찬가지로 발효를 하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썩어버린 차들은 냄새도 고약할 뿐만 아니라 더러 진드기와 같은 벌레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물론 그런 차들이 뒤로 빼돌려져 화학약품처리가 된 후 유통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폐기처분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가짜는 아니지만 보이차의 품질과 관련되는 것으로는 보관상태의 문제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보이차라도 10년, 20년 묵히는 공간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맛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대만등지에서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보관되었다'란 말을 흔히 듣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일반 집등에서 보관된 제품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은 보관을 오랫동안 해야하는 보이차의 특성상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색, 향, 맛과 더불어 좋은 기(氣)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① 좋은 차엽으로 제대로 발효가 되어야 하고, ② 좋은 상태에서 보관되어야 합니다.
위의 조건을 모두 갖춘 보이차를 "제대로 된 보이차", "정상적인 보이차" 혹은 "진정(眞正) 보이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중국, 대만, 우리나라에서 위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보이차가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보이차가 아닌 보이차를 가짜 보이차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렇게 위조품이 대량 유통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차 보이차의 경우 20년을 넘어 50년정도까지 발효시키는 것이 있는데, 이처럼 연도가 오래되면, 높은 가격을 받고 팔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보이차는 값이 말할 수 없이 비쌉니다. 동경호나 송빙호와 같은 골동차는 말할 것도 없이 조기홍인원차와 같은 인급차도 대만이나 홍콩에서 150 ~ 200만원에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짜가 대량으로 제조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만에서 동경호 500편을 조사해 봤더니 그 중 14편만이 진품이었다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보이차를 위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훨씬 싸구려 차를 가지고 껍질만 바꿔 싼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무지녹인( 이 차도 요즘엔 정말 비쌉니다.) 같은 차에 송빙호 포장을 해서 송빙호라고 파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은 아주 갓 만든 신차(신차의 가격은 한국 돈으로 몇천원밖에 하지 않습니다)를 화학처리를 거쳐서 재포장한 경우입니다. 화학적으로 위조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쓰이는 대표적인 화학제로서는 카바이트, 황산가스, 불소, 염소수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화학제를 이용해서 생차의 강한 맛과
향과 색 등을 빼버린 후 오래 묵은 듯하게 만들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썩은 보이차가 있습니다. 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악퇴 도중 썩어버린 차를 그대로 유통시키는 것입니다. 보이차 제조 과정에서 악퇴를 하다가 썩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면 그 차엽은 당연히 폐기처분을 해야하는데 그런 차들이 뒤로 돌려져서 화학처리를 한 후 좋지 않은 맛과 향을 빼고 긴압을 해서 유통되는 경우입니다.
메주를 띄우다가도 잘못 발효를 시켜서 썩어버리는 경우가 있듯이 숙차 보이차도 마찬가지로 발효를 하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썩어버린 차들은 냄새도 고약할 뿐만 아니라 더러 진드기와 같은 벌레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물론 그런 차들이 뒤로 빼돌려져 화학약품처리가 된 후 유통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폐기처분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가짜는 아니지만 보이차의 품질과 관련되는 것으로는 보관상태의 문제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보이차라도 10년, 20년 묵히는 공간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맛은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대만등지에서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보관되었다'란 말을 흔히 듣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창고에 들어가지 않고 일반 집등에서 보관된 제품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은 보관을 오랫동안 해야하는 보이차의 특성상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차 고르기 - 손성구
좋은 보이차 옳게 고르기............손성구
현재 우리나라 차시장에도 중국의 보이차가 많이 들어와, 중국차를 파는 차가게 뿐만아니라 사이버 쇼핑몰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보이차를 팔고 있다. 상인들은 모두 보이차가 건강에 매우 좋고, 오래 묵을수록 더 좋다고 소개한다. 사실 그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는 웬만큼 제대로 보이차를 접하고, 마셔보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첫째 보이차를 파는 차상인들조차 진짜 보이차를 제대로 모른다. 둘째 차상인들이 진짜를 알아도, 진짜 보이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60년 이상된 보이차들은 가격이 몹시 비싸며 수량도 극히 적어, 대부분이 홍콩이나 대만의 수장가들이 소장하고 있어 한국에까지 들어올 양이 거의 없다. 10여 년간의 보이차 생활과 보이차에 대한 연구, 대만의 "보이차" 저자 등시해(鄧時海) 선생과의 토론을 통해 얻은 경험을 기술하려고 한다.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 위해서는 먼저 몇가지 사항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매변의 발생 여부이다.
매변이란 보이차에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를 말한다. 매변의 발생 여부는 보이차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가장 먼저 이해되고 중시해야 하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그 본래의 맛과 향기가 그 본래의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가치는 이미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 가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가 무해한지 유해한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한 보이차 연구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체에 무해하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어, 일본에서는 매변이 일어난 누룩곰팡이가 핀 보이차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많은 연구가와 전문가들은 오히려 인체에 유해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산 동의대학 생물학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체에 나쁜 미생물이 있다고도 한다. 대만에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격이 십분의 일인 것을 볼 때도 이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에서 여러 상인들이 한때 오래묵은 보이차를 팔면서 대만에서는 같은 물건이 4-5배 비싼데, 자기들은 4-5분의 1 가격으로 판다고 말하곤 했다. 그 당시 필자와 여러사람들도 함께 의아해한 이유가 그러면 그 보이차들을 대만에 갔다 팔면 더 좋지않나 생각한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치가 제대로 완전한 물건의 10분의 1 밖에 안되기 때문이었다.
둘째, 보이차의 외형적 색깔을 살펴야 한다.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색깔이 검고 짙다. 필자가 등시해 교수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제대로 저장된 보이차들은 마치 낙엽을 곱게 보관한 것처럼 밝은 황색들이었다. 짙거나 검게 변한 차들은 이미 매변이 일어났거나 처음부터 숙창으로 만들어진 보이차로 보면 된다.
셋째, 보이차의 무게이다.
정상적인 보이차들은 손으로 들어보았을 때 마치 솜털같이 가볍다. 필자가 처음 복원창호와 동경호를 손으로 만졌을 때 너무 가벼워 손위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 이유는 90년에서 1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곰삭었기 때문에, 차잎의 형태들은 그대로이지만 차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낙엽들을 수 간만 보관해도 가벼운 것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60년, 70년, 90년, 100여년 동안의 긴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생각해 보면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넷째, 보이차의 맛이다.
50년이상의 보이차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보이차를 마신 분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짚신 썩은 맛이거나 볏집 썩은 맛이거나 몹시 쓰고 찝찔하다 등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이것이 보이차 맛의 특징이라고 소개받았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소개했다. 많은 분들은 아직도 이런 맛이 보이차의 특징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보이차의 맛은 전혀 그렇지 않고, 맑고 깨끗하고 달고 장뇌나무 향이 서려있다. 불쾌한 맛이 나는 보이차들은 차상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미 매변이 일어나 본래의 맛과 향기가 사라졌거나, 보관이 매우 잘못되어 부패되었거나 처음부터 속성발효로 만든 싸구려 차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차를 우려내고 난 뒤의 차잎 즉 茶底(차저)를 살펴야 한다.
정상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은 손으로 잘 찢어지고, 잎 표면도 부드럽다. 또한 차잎 줄기도 부드럽게 끊어지나다. 그러나 속성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이 매우 질기고 잎 표면도 거칠다. 특히 차잎 줄기는 생잎과 같이 매우 질기고 찢기 힘들다.
여섯째, 보이차를 시음할 때 차의 농도에 주의해야 한다.
대만의 "보이차"의 저자 등시해 교수는 보이차를 마실 때 아주 여리게 마셔야 그 차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고, 오히려 너무 진하게 마시면 혀가 마비되어 차의 참 맛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가짜차를 팔 때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여 보이차를 진하게 우려낸다고 한다. 이런 음다법은 차상인의 저의가 짙게 깔려 있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혀를 마비시켜 차를 제대로 감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차 사용량을 많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차가게에서도 보이차를 마실 때 거의가 매우 진하게 우려낸다. 또 검고 진하게 차를 마실 줄 알아야 보이차를 많이 아는 것으로 평가해 주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차가 너무 진하면 위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어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되고, 차 맛도 제대로 즐길수 없으며, 경제적 부담도 크다고 한다.
일곱째, 오래묵은 진짜 보이차의 수량이다.
복원창, 동경호, 경창, 강성, 홍인 등의 오래된 보이차들은 그 수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대만, 홍콩에서도 일부 보이차 수장가들한테만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 그렇게 많은 보이차들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대만의 한 차상인이 "대만에서는 돈은 있으나 보이차가 없어 차를 살 수 없고, 한국에서는 보이차는 많으나 돈이 없어 차를 살수 없다"라는 말은 현재 한국의 보이차 실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등시해 교수가 직접 감정한 동경호가 2통(14편)이 채 안된다고 한다.
여덟째, 정상적으로 제다한 10년 미만의 보이차의 품질도 훌륭하다.
어떤 차상인은 30년 이하의 보이차는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2급의 대엽종잎으로 만든 산차들은 햇차라도 맛과 향이 매우 뛰어나다. 병차의 가격도 250그램 한편에 3만원 이하로 매우 싸다. 우리들은 보이차가 매우 비싼 줄 알지만, 요즈음 나오는 보이차들은 매우 싸다. 이 사이트의 <보이차가격표>란에 현재 대만과 중국에서의 보이차 가격을 게재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보이차를 올바르게 고르기 위해서는, 차상인의 설명이나 논리에 상관하지 말고 위의 몇가지 사항을 참고하여 꼭 시음해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통으로 구입하는 분은 통속의 7편이 색깔이나 상태가 균일한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만에서 등시해 교수에게 감정받으러 온 1통의 동경호에서, 맨 윗장 1편만 진짜이고 나머지 6편은 가짜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차시장에도 중국의 보이차가 많이 들어와, 중국차를 파는 차가게 뿐만아니라 사이버 쇼핑몰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보이차를 팔고 있다. 상인들은 모두 보이차가 건강에 매우 좋고, 오래 묵을수록 더 좋다고 소개한다. 사실 그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는 웬만큼 제대로 보이차를 접하고, 마셔보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첫째 보이차를 파는 차상인들조차 진짜 보이차를 제대로 모른다. 둘째 차상인들이 진짜를 알아도, 진짜 보이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60년 이상된 보이차들은 가격이 몹시 비싸며 수량도 극히 적어, 대부분이 홍콩이나 대만의 수장가들이 소장하고 있어 한국에까지 들어올 양이 거의 없다. 10여 년간의 보이차 생활과 보이차에 대한 연구, 대만의 "보이차" 저자 등시해(鄧時海) 선생과의 토론을 통해 얻은 경험을 기술하려고 한다.
좋은 보이차를 고르기 위해서는 먼저 몇가지 사항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매변의 발생 여부이다.
매변이란 보이차에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를 말한다. 매변의 발생 여부는 보이차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가장 먼저 이해되고 중시해야 하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그 본래의 맛과 향기가 그 본래의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가치는 이미 원래 가격의 십분의 일 가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검고 퍼렇게 핀 누룩곰팡이가 무해한지 유해한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한 보이차 연구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체에 무해하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어, 일본에서는 매변이 일어난 누룩곰팡이가 핀 보이차의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많은 연구가와 전문가들은 오히려 인체에 유해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산 동의대학 생물학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체에 나쁜 미생물이 있다고도 한다. 대만에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격이 십분의 일인 것을 볼 때도 이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에서 여러 상인들이 한때 오래묵은 보이차를 팔면서 대만에서는 같은 물건이 4-5배 비싼데, 자기들은 4-5분의 1 가격으로 판다고 말하곤 했다. 그 당시 필자와 여러사람들도 함께 의아해한 이유가 그러면 그 보이차들을 대만에 갔다 팔면 더 좋지않나 생각한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의 가치가 제대로 완전한 물건의 10분의 1 밖에 안되기 때문이었다.
둘째, 보이차의 외형적 색깔을 살펴야 한다.
매변이 일어난 보이차는 색깔이 검고 짙다. 필자가 등시해 교수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제대로 저장된 보이차들은 마치 낙엽을 곱게 보관한 것처럼 밝은 황색들이었다. 짙거나 검게 변한 차들은 이미 매변이 일어났거나 처음부터 숙창으로 만들어진 보이차로 보면 된다.
셋째, 보이차의 무게이다.
정상적인 보이차들은 손으로 들어보았을 때 마치 솜털같이 가볍다. 필자가 처음 복원창호와 동경호를 손으로 만졌을 때 너무 가벼워 손위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 이유는 90년에서 1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곰삭었기 때문에, 차잎의 형태들은 그대로이지만 차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낙엽들을 수 간만 보관해도 가벼운 것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60년, 70년, 90년, 100여년 동안의 긴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생각해 보면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넷째, 보이차의 맛이다.
50년이상의 보이차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보이차를 마신 분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짚신 썩은 맛이거나 볏집 썩은 맛이거나 몹시 쓰고 찝찔하다 등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이것이 보이차 맛의 특징이라고 소개받았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소개했다. 많은 분들은 아직도 이런 맛이 보이차의 특징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보이차의 맛은 전혀 그렇지 않고, 맑고 깨끗하고 달고 장뇌나무 향이 서려있다. 불쾌한 맛이 나는 보이차들은 차상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미 매변이 일어나 본래의 맛과 향기가 사라졌거나, 보관이 매우 잘못되어 부패되었거나 처음부터 속성발효로 만든 싸구려 차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차를 우려내고 난 뒤의 차잎 즉 茶底(차저)를 살펴야 한다.
정상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은 손으로 잘 찢어지고, 잎 표면도 부드럽다. 또한 차잎 줄기도 부드럽게 끊어지나다. 그러나 속성 발효된 보이차는 차저의 잎이 매우 질기고 잎 표면도 거칠다. 특히 차잎 줄기는 생잎과 같이 매우 질기고 찢기 힘들다.
여섯째, 보이차를 시음할 때 차의 농도에 주의해야 한다.
대만의 "보이차"의 저자 등시해 교수는 보이차를 마실 때 아주 여리게 마셔야 그 차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고, 오히려 너무 진하게 마시면 혀가 마비되어 차의 참 맛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가짜차를 팔 때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여 보이차를 진하게 우려낸다고 한다. 이런 음다법은 차상인의 저의가 짙게 깔려 있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혀를 마비시켜 차를 제대로 감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차 사용량을 많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차가게에서도 보이차를 마실 때 거의가 매우 진하게 우려낸다. 또 검고 진하게 차를 마실 줄 알아야 보이차를 많이 아는 것으로 평가해 주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차가 너무 진하면 위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어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되고, 차 맛도 제대로 즐길수 없으며, 경제적 부담도 크다고 한다.
일곱째, 오래묵은 진짜 보이차의 수량이다.
복원창, 동경호, 경창, 강성, 홍인 등의 오래된 보이차들은 그 수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대만, 홍콩에서도 일부 보이차 수장가들한테만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 그렇게 많은 보이차들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대만의 한 차상인이 "대만에서는 돈은 있으나 보이차가 없어 차를 살 수 없고, 한국에서는 보이차는 많으나 돈이 없어 차를 살수 없다"라는 말은 현재 한국의 보이차 실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등시해 교수가 직접 감정한 동경호가 2통(14편)이 채 안된다고 한다.
여덟째, 정상적으로 제다한 10년 미만의 보이차의 품질도 훌륭하다.
어떤 차상인은 30년 이하의 보이차는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2급의 대엽종잎으로 만든 산차들은 햇차라도 맛과 향이 매우 뛰어나다. 병차의 가격도 250그램 한편에 3만원 이하로 매우 싸다. 우리들은 보이차가 매우 비싼 줄 알지만, 요즈음 나오는 보이차들은 매우 싸다. 이 사이트의 <보이차가격표>란에 현재 대만과 중국에서의 보이차 가격을 게재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보이차를 올바르게 고르기 위해서는, 차상인의 설명이나 논리에 상관하지 말고 위의 몇가지 사항을 참고하여 꼭 시음해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통으로 구입하는 분은 통속의 7편이 색깔이나 상태가 균일한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만에서 등시해 교수에게 감정받으러 온 1통의 동경호에서, 맨 윗장 1편만 진짜이고 나머지 6편은 가짜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이차의 역사
商周時代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雲南(운남)의 복족( 族) 사람들은 이미 보이차 나무를 심었고 보이 차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史料에는 복족인들이 상왕(商王)에게 키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商나라 때 복족인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때 常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 촉(蜀)의 군대를 얻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공납케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巴蜀의 군대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인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운남은 차의 고향이니, 이로써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인들은 이미 차잎을 생산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 12 쪽에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그 지역은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설은, 상주(商周)시기에 운남에서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시기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의 옥쇄를 하사하였다.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 池縣)을 다스렸다. 三國時期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도( )라고 부르고, 선(選)이라고도 부른다.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山陵의 경계에서 자란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채집해 말린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도( )자는 문장 뜻에 비추어 볼 때, 차잎이니, 운남지역에서 한(漢)나라 시대에 茶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남겼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의 시작을 펼쳤다. '茶山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는데, 五山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자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무후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공명(孔明)선생이다.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다, 지금의 운남성 西雙版納(서쌍판납)자치주, 海(맹해)의 南 山(남나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 중에서 "5월에 瀘江(지금의 금사강)을 건넜다"고 기록한 것은 곧 전남( 南)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지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夷族(이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의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전해 심은 것이어서 夷民族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야사로서 전해지고 있지만, 보이차의 正史적 기록이 없는 시기에는 매우 의존 할만하다.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번작(樊綽)이 벼슬을 버리고 운남의 南沼地(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蠻書(만서)>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 지역의 여러 산에서 생산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라 는 기록이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 지역은 지금의 운남성 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를 생산하였을 뿐만아니라, 5백여리 밖에까지 판매 공급되어서, 海(이해) 부근의 몽사(지금의 운남성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음용했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잎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은생성 지역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잎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를 비추어 보면, 은생성 지역의 차는 당연히 운남의 대엽차종 종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엽차종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종이고 보이차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지역에서 나는 차잎은 당연히 보이차의 시조이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가 같아서 당나라 때 은생성 지역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고 본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 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 길"이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육우(陸羽)는 당대의 차에 있어 큰 스승이다. 그의 저서 <다경(茶經)>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차관련 저서로 평가받고, 그런 이유로 [다신(茶神)]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육우와 함께 이름을 날린 차의 대가로 문인인 노동(盧仝)이 있다.
송대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수시로 채취하여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잎은 여전히 확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송시기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잎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 외에 더욱 중요한 점이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차잎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왕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 수 있으며 "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확고한 사실이 됐다.
원대
원(元)나라는 전체 중국차 문화의 전승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원나라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를 남겼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가는데, 그가 마신 차나무 잎은, 바로 운남 대엽차종의 후손일 것이며 다시 말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으며,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런데 원나라에서부터 보이차는 그 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普 府)로 되었다. 이로부터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힌 이 지역 시장에서 매매하는 필수상품이 되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 이 때부터 그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 사조제(謝는肇 )는 그의 <전략( 略)>중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보차"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인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가 쓰고, 그의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에 의해 1664년에 출판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 것을 참고 할 수 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케 하였다. 이에 1391년에 "용단(龍團,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공납하라"는 공차 개혁의 명을 내려, 검소하고 소박한 사회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는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운남에서 흥기하여, 운남과 서역 사이를 대상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 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와서. 차잎으로 교환하여 갔다.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사람과 말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전문 교역로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서쌍판나의 6대 차산 지역의 남쪽 끝인 이무진(易武鎭)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보이진과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이러한 운남의 경내를 거치는 길을"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이무진에서 석고진으로 이르는 돌로 포장한 길은 "석괴고차도(石塊古茶道)"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석고진에서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고차도와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茶道의 길을 따라 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잎의 제일 중요한 중심집산지로 개발되었고, 점점 상인들은 운남 차잎과 보이부가 하나로 인식되게 되어,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 지역내의 교목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 제품은 모두 일률적으로 보이차라고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청대
청대의 보이차는 환골탈태하여 귀중시 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공차가 되어 가장 빛나고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성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옹정(雍正)황제는 1726년에 만주족인 심복대신 악이태(鄂爾泰)를 운남총독으로 임명하고, 3년 뒤 "보이부치(普 府治)"를 설치하여 보이차의 매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 해 가장 여린 잎으로 만든 차를 진상케 하는" 정책을 써서 가장 좋은 보이차를 북경에 공납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어 수차례 황제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다.
매년 보이차의 제작과 운영을 위해, 청나라 조정은 보이부의 영이(寧 )지방에 보이공차 공장을 건립하여, 매년 청조정에 공차를 진상했는데, 그 가치가 당시에 쌀을 십여만 섬을 살수 있는 금액이었다.
공차의 종류는 8가지로 오근단차(五斤團茶), 삼근단차(三斤團茶), 일근단차(一斤團茶), 사량단차(四兩團茶), 일량오전단차(一兩五錢團茶), 병장아차산차(甁裝芽茶散茶), 예차산차, 갑장차고(匣裝茶膏) 등이다.
보이현 서문산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황궁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普 女芽茶), 보이다고(普 茶膏)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서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가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시작되었다가,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보이 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근 200년 동안 깊은 찬사 속에서 마셔졌다. .청대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순하고 진하여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들에게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따라 보이차를 만드는 차장(茶莊, 차상점)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 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元泰豊) 등의 차장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서쌍판납의 6대차산의 최고 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 차산을 드나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 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중국내 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 차산의 차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차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 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雲南(운남)의 복족( 族) 사람들은 이미 보이차 나무를 심었고 보이 차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史料에는 복족인들이 상왕(商王)에게 키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商나라 때 복족인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때 常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 촉(蜀)의 군대를 얻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공납케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巴蜀의 군대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인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운남은 차의 고향이니, 이로써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인들은 이미 차잎을 생산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 12 쪽에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그 지역은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설은, 상주(商周)시기에 운남에서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나라 시기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의 옥쇄를 하사하였다.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 池縣)을 다스렸다. 三國時期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도( )라고 부르고, 선(選)이라고도 부른다.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山陵의 경계에서 자란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채집해 말린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도( )자는 문장 뜻에 비추어 볼 때, 차잎이니, 운남지역에서 한(漢)나라 시대에 茶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남겼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의 시작을 펼쳤다. '茶山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는데, 五山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자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무후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공명(孔明)선생이다.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다, 지금의 운남성 西雙版納(서쌍판납)자치주, 海(맹해)의 南 山(남나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 중에서 "5월에 瀘江(지금의 금사강)을 건넜다"고 기록한 것은 곧 전남( 南)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지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夷族(이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의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전해 심은 것이어서 夷民族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야사로서 전해지고 있지만, 보이차의 正史적 기록이 없는 시기에는 매우 의존 할만하다.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번작(樊綽)이 벼슬을 버리고 운남의 南沼地(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蠻書(만서)>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 지역의 여러 산에서 생산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라 는 기록이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 지역은 지금의 운남성 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를 생산하였을 뿐만아니라, 5백여리 밖에까지 판매 공급되어서, 海(이해) 부근의 몽사(지금의 운남성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음용했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잎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은생성 지역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잎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를 비추어 보면, 은생성 지역의 차는 당연히 운남의 대엽차종 종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엽차종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종이고 보이차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지역에서 나는 차잎은 당연히 보이차의 시조이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가 같아서 당나라 때 은생성 지역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고 본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 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 길"이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육우(陸羽)는 당대의 차에 있어 큰 스승이다. 그의 저서 <다경(茶經)>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차관련 저서로 평가받고, 그런 이유로 [다신(茶神)]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육우와 함께 이름을 날린 차의 대가로 문인인 노동(盧仝)이 있다.
송대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수시로 채취하여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잎은 여전히 확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송시기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잎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 외에 더욱 중요한 점이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차잎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왕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 수 있으며 "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확고한 사실이 됐다.
원대
원(元)나라는 전체 중국차 문화의 전승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원나라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를 남겼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가는데, 그가 마신 차나무 잎은, 바로 운남 대엽차종의 후손일 것이며 다시 말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으며,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런데 원나라에서부터 보이차는 그 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普 府)로 되었다. 이로부터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힌 이 지역 시장에서 매매하는 필수상품이 되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 이 때부터 그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 사조제(謝는肇 )는 그의 <전략( 略)>중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보차"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인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가 쓰고, 그의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에 의해 1664년에 출판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 것을 참고 할 수 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케 하였다. 이에 1391년에 "용단(龍團,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공납하라"는 공차 개혁의 명을 내려, 검소하고 소박한 사회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는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운남에서 흥기하여, 운남과 서역 사이를 대상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 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와서. 차잎으로 교환하여 갔다.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사람과 말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전문 교역로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서쌍판나의 6대 차산 지역의 남쪽 끝인 이무진(易武鎭)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보이진과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이러한 운남의 경내를 거치는 길을"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이무진에서 석고진으로 이르는 돌로 포장한 길은 "석괴고차도(石塊古茶道)"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석고진에서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고차도와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茶道의 길을 따라 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잎의 제일 중요한 중심집산지로 개발되었고, 점점 상인들은 운남 차잎과 보이부가 하나로 인식되게 되어,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 지역내의 교목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 제품은 모두 일률적으로 보이차라고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청대
청대의 보이차는 환골탈태하여 귀중시 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황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공차가 되어 가장 빛나고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성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옹정(雍正)황제는 1726년에 만주족인 심복대신 악이태(鄂爾泰)를 운남총독으로 임명하고, 3년 뒤 "보이부치(普 府治)"를 설치하여 보이차의 매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 해 가장 여린 잎으로 만든 차를 진상케 하는" 정책을 써서 가장 좋은 보이차를 북경에 공납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어 수차례 황제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다.
매년 보이차의 제작과 운영을 위해, 청나라 조정은 보이부의 영이(寧 )지방에 보이공차 공장을 건립하여, 매년 청조정에 공차를 진상했는데, 그 가치가 당시에 쌀을 십여만 섬을 살수 있는 금액이었다.
공차의 종류는 8가지로 오근단차(五斤團茶), 삼근단차(三斤團茶), 일근단차(一斤團茶), 사량단차(四兩團茶), 일량오전단차(一兩五錢團茶), 병장아차산차(甁裝芽茶散茶), 예차산차, 갑장차고(匣裝茶膏) 등이다.
보이현 서문산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황궁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普 女芽茶), 보이다고(普 茶膏)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서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가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시작되었다가,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보이 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근 200년 동안 깊은 찬사 속에서 마셔졌다. .청대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순하고 진하여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들에게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따라 보이차를 만드는 차장(茶莊, 차상점)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 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元泰豊) 등의 차장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서쌍판납의 6대차산의 최고 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 차산을 드나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 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중국내 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 차산의 차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차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 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보이 명차
보이 명차
복원창호
청나라 때 왕싱에게 바치는 푸얼공차의 차잎은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이 주된 원료였다. 이에 따라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은 청나라 말기 이전의 차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의방차구의 푸얼차 가게들이 무척 흥성하였으나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 고증할 수 있는 차가게의 상호는 오직 송운호와 원창호 두 가게뿐이다.
청나라 중기 이무산의 대엽종 푸얼차 사업이 활기를 띠자 의방차구의 소엽종을 주로 취급해왔던 원창호도 이에 가세해 이무의 상업거리에 분점을 개설하였다. 분점의 이름을 복원창호라 지었으며 이무산의 대엽종 차잎만 취급해 엄선한 차잎으로 만든 푸얼원차를 고급 차인들에게 공급하였고 해외시장으로도 수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접어들어 정세의 불안 및 치안부재, 유행성 질병까지 겹치자 푸얼차를 취급하는 모든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이 때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과 이무의 복원창호 분점도 같은 운명을 맞아 폐업하게 된다.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은 완전히 폐업한 반면 이무차그의 복원창호 분점은 1922년에 다시 개업한 차가게였다.
복원창원차는 동경노호와 쌍벽을 이루는 푸얼차의 극품이다. 차의 묵은 맛을 판단해 보면 동경노호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고, 포장인 죽순 껍질의 재질은 동경노호에 비해 떨어지지만 아주 좋은 재료에 속하며, 묶는 기술도 동경노호의 방법과 동일하다.
내비와 내표의 재질은 모두 오볼라토이기에 대부분 좀벌레가 먹어 완전한 형태는 보기가 어렵다. 또한 내표와 내비의 그림, 글자의 원판은 모두 인장을 새겨서 수공으로 찍어낸 것으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복원창원차는 이무정산 대엽종 차잎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푸얼차이기에 오늘날 중국의 푸얼차계에서는 복원창원차를 가리켜 푸얼차왕이라 극찬한다.
오늘날 의방차구의 원창로 본점에서 생산된 푸얼원차 제품을 볼 수 없으며 이무의 복원창호분점의 푸얼원차만 있는데 이도 또한 극소수의 푸얼차 수장가의 수중에 들어가 푸얼차의 유통 시장에서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동경호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에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립하였다. 동경호는 개점이후 약 200년간 줄곧 용마상표의 내표를사용했는데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1950년 중국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차가게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하자 동경호는 휴업을 선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50년대 폐업 이전의 동경호의 모든 제품은 가장 좋은 이무산의 야생 대엽종차잎, 일쇄, 건창 등 정통 제다법으로 만들어졌기에 오늘날 푸얼차계에서는 최고의 푸얼차로 대접받는다. 동경호의 명성이 커지자 당시 사용했던 용마상표인 내표를 본뜬 위조품이 나돌기 시작했다. 때문에 1920년 8월부터 내표의 모양을 쌍사기도로 변경한다. 따라서 오늘날 1920년 이전 용마상표를 내표로 사용했던 시기의 동경호 푸얼차를 동경노호푸얼이라 부르며, 폐업할 때까지 사용했던 쌍사기도푸얼차는 통상 동경푸얼차라고 부른다.
용마상표로 유명한 동경노호 푸얼원차는 따스한 3월 봄날의 이무산의 2,4,5등급의 어리고 부드러운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는 비교적 넓고 직경이 약20cm, 무게는 340g이며 오랜기간의 저장을 걸치면 차의 겉면은 집은 밤색을 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홍태창호
오늘날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는 홍태창호는 중국 운남성 의방 홍창호가 1930년대 해외 판매망의 거점하나로 태국 방콕에 설치한 지점의 제품이다.
초기 제품은 의방의 소엽종차잎 제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음 모두다 대엽종 푸얼차이다. 초기제품의 차잎은 단단하면서 가늘고 길었으며 차의 새순에 달린 가지의 색은 금황색을 띄우며 차 덩어리의 표면은 반들반들하였다. 우려낸 탕색은 밤색이고 수성은 담백하며 운남성 소엽종 차잎의 야생 청향이 짙게 뽐낸다.
근래 홍콩의 홍태창회사가 운남성에서 푸얼차잎을 수입하여 압제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품은 묵은 푸얼차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므로 선택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송빙호
송빙호 차상점은 청나라 광서 초기에 이무진에서 창립하였으며 많은 양의 푸얼차를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푸얼차시장의 송빙호 푸얼차 제품은 범람할 정도로 많으나 대체로 5%의 진품롸 95%의 가품들이 있다. 그러나 5%의 진품 송빙호푸얼차제품도 질이 무척 낮은 것이기에 건리정송빙호 또는 옛 송빙호시대에 만들어진 푸얼차를 발견하면 푸얼차의 진품 혹은 극품이라 대접을 받는다.
현재 푸얼차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가짜 송빙호 제품 종류는 대체로 5-6가지 된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푸얼차제품으로 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유통하는 것인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 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의 격동기에 생산된 푸얼차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표도 없이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에 운반하여 팔았다. 오늘날 소위 가짜 푸얼차라는 것이 이 시대에 생산된 이름 없는 푸얼차에 유명상표를 붙여 유통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교적 좋은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어 유명해진 맹해차공장에서도 이러한 상표 없는 제품들을 많이 출하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제품을 포장지 없는 녹인이라 부른다.
2)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재배형 관목푸얼차잎의 등장등의 원인에 의해 70년대 이후부터 많은 상인들이 동남아지역의 대엽종 차잎인 변경푸얼 특히 월남의 대엽차잎과 중국 광동성 지역에서 생산된 푸얼산차를 만들었다. 이 때 일부 악덕상인들이 인쇄한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가짜를 진짜처럼 유통하였고, 후일 묵은 대엽종 푸얼차가 선풍적으로 유행하게되자 이러한 제품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3) 홍콩에 설립되었던 송빙호의 지점인 복화호에서도 가짜를 만들었다. 초기에 주로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었으나 후일 중국 공산정권의 정세로 인해 부득이 월남지방의 대엽종 차잎을 구입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남아지역의 변경푸얼로 만들어진 푸얼차가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자 복화호지점은 중국 본점의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속여 팔았다.
경창호
중화민국 초기 경창호 차가게는 운남성 강성지역세서 규모가 제일 크고 이름을 날닌 푸얼차가게 중의 하나였다. 경창원차는 푸얼정산 즉 만쇄차산의 제일 좋은 대엽종 차잎을 채집하여 만든다. 만쇄산은 라오스 접경지역의 위치에 있으며 옛 이무산의 북쪽 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쇄산의 차잎 품질은 이무차산의 다음 가는 으뜸제품이다.
경창원차의 대엽종 차잎 크기는 넓고 크다. 가지 또한 굵고 견실하며 특히 차잎은 마치 차기름에 담가두었던 것처럼 기름진 빛이 가득하고 황금빛의 차순이 발하고 있다. 압축 제조 기술이 정교하고 규칙적이며 가장자리의 두께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덩어리의 표면은 고르다. 덩어리의 직경이 20.5cm이고, 무게는 약330g이다.
가벼운 녹나무 향기에 차맛이 극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워 입안에 들어가면 즉시에 녹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이 푸얼원차 제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다. 각 덩어리에는 내비 한 장씩 있는데 타원형의 도안이며, 동경노호의 내비 디자인과 매우 유사하다.
예로부터 운남성 개인 차가게에서 만든 푸얼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호의 푸얼원차의 제조 공정과 기술이 가장 정교하고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강성원차
1950년대 중국 공산정권 하에 차잎 수매지역에 따라 차잎의 가격을 매겼다. 운남성에서도 이를 따라 차잎의 품질을 통제, 기술 수준의 평등화 등을 통해 공정한 교역이 될 수 있도록 일률적인 가격을 정했다. 이때 강성현, 란창현은 모두 시쐉반나의 푸얼차 수매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강성현에서 자란 차잎은 시쐉반나(西雙版納)의 푸얼 차잎과 대등할 뿐만 아니라 품질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강성원차는 보경원차와 같이 오직 내표만 있고 내비는 없는 푸얼원차이다.
강성원차의 덩어리는 단단하며 직경은 19.5㎝이고 무게는 약 320g이다. 특수한 압축 기술로 인해 덩어리 평면이 고르지 않았고 가장자리의 두께는 녹색을 띄며 고르지도 않았다. 가지 줄기는 납작하고 길었으며 밤색나는 황색 빛깔에 차잎은 반지르하며 윤기가 난다. 전체적으로 경창원차와 매우 비슷하며 대뎝종 푸얼차잎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풍기는 녹나무 향은 비교적 약하나 묵은 청향이 짙어 상쾌한 맛이 난다. 차맛이 비교적 가벼우나 부드러우면서 순하기에 마시고 나면 진액이 생겨 좋은 푸얼차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푸얼차계의 일부 인사들이 강성원차를 가리켜 경창원차의 자매품이라고 말한다. 이는 강성원차도 경창원차와 같이 1930년대에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동흥호
동흥호 차가게의 옛 이름은 동순상호 또는 중신행이라 한다. 1733년 이무진에서 창립되었으며 1921년 전후 동경호와 같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이름을 떨쳤던 차가게였다. 그때 동흥호에서 생산된 푸얼차의 수량은 해마다 약 500담으로 이는 대형의 차가게에 속한다.
오늘날 동흥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권 하인 1921년부터 1934년 사이에 만든 것은 총상 동흥초기원차라 부르며 1934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정권 탄생이전까지 만든 것은 동흥후기원차라고 부른다. 양자의 차잎은 모두 의방차산의 만송다원에서 채취한 소엽종 차잎이기에 품질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동창호
동창호는 1869년 청타라 동치7년에 창립되었으나 청나라 말기 정국 불안으로 인하여 폐업했다.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바뀌고 푸얼차 시장이 점차 안정을 찾자 1921년 전후에 많은 차상점들이 이무차구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이때 새로 창업한 차가게들도 많았다. 그 중 주관보라는 차상인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동창호 차가게를 해로이 설립하여 이무정산의 푸얼차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1931년경 황문흥이라는 상인이 동창호를 인수하고 가게를 운영했다. 주인이 바뀌었어도 계속 동창호라는 상호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다만 원차의 내비의 낙관에 '주인 황문홍이 삼가 올림'이라고 고쳐 썼다.
오늘날 내비의 문구, 디자인의 색상에 따라 동창호 푸얼원차는 세 가지로 나눈다. 동창원차, 동창황기남원차, 동창황기홍원차 등이 그것이다. 1949년 경 황금당씨가 동창호를 인수할 때 상호를 동창황기라고 고쳤다. 이때 원차 내비의 디자인 도안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색의 내비, 하나는 붉은 색의 내비로 만들었다.
남색 내비의 낙관에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찍혀있는 것을 동창황기남원차라고 하고, 묽은 색 낙관에 같은 내용의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동창황기홍원차라고 말한다. 양자는 모두 약 50년 정도 묵인 푸얼원차이다.
전기의 동창원차의 덩어리는 두텁고 짙은 밤색을 띈다. 가지 줄기가 납작하면서 길고 흰 솜털인 백호는 거칠면서 두텁다. 줄기와 차잎이 정렬하게 혼합되어 있어 좋은 푸얼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동창원차는 다른 동창호 원차에 비해 겉 표면의 윤기가 좋다.
후기의 동창황기남원차의 외관은 전기의 동창원차와 아주 비슷하다. 빛깔과 윤기도 대체로 같으며 다만 가지 줄기가 좀 가늘고 차잎이 약간 마르게 보이므로 동창원차보다는 질이 떨어진 제품이다.
양빙호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양빙호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빙호를 소개하는 이유는 양빙원차는 의방차구의 소엽종으로 만든 푸얼원차이기 때문이다.
푸얼차를 논한다면 운남성 [6대차산] 즉 [이무차구-易武茶區]를 빼놓고는 애기 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6대차산]이란 西雙版納 내의 攸樂, 革登, 莽芝, 蠻專, 漫撤, 依邦 등의 차산을 말한다.
그러나 원, 명,나라부터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운남성의 6대차산의 이름은 오늘날과는 다르다.
이 시대에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이무산, 우곤당산 절반과 만랍산 절반을 합쳐 5대차산이라 했고, 후일 유락산 일명 공명산과 다시 합쳐 6대차산이라 불렀다. 이 중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우곤당산 절반의 차산 등 전지역을 가리켜 의방차산라고 한다.
의방차산은 운남성 내에서 제일 먼저 소엽종 차잎을 재배한 차산이다. 운남성의 소여종 차잎은 명나라 말기 사천성 다농들이 이곳 의방차산으로 이주해 올 때 소엽종 차씨를 가져와 재배했던 것이다.
의방의 소엽종 차맛은 대엽종 푸얼의 진하고 두터운 맛의 특성을 가지면서 소엽종의 청향을 겸해 뒷맛이 달고 매끄럽다. 또한 여린 것이 늙은 것 보다 향기롭고 새것이 묵은 것 보다 진하며 싱싱한 것을 물에 울구어 마시기가 가장 적합하다.
양빙원차의 덩어리는 여타 푸얼원차 보다 비교적 작은 편이다. 직경이 19㎝이며, 무게는 약 280g이다. 매 덩어리마다 5×6.8㎝의 가로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묽은 글씨로 되어있다. 덩어리 표면의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었으며 윤기가 나는 누른 싹도 보인다. 차탕은 청향이 나고 차맛은 진하지 않으나 약간 신맛이 섞여 있어 의방 소엽종 푸얼차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푸얼원차이다.
홍인원차
홍인원차를 논하고자 하면 범화균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40년에 운남성 불해에 임시로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들들로부터 품질 좋은 야생차잎을 사들여 처음으로 푸얼원차를 제조하였다. 그중 시험적으로 제조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홍인푸얼원차와 녹인푸얼원차 등 푸얼차제품이다.
이 때 원차의 겉면 포장지의 정 중앙에는 8중차(8中茶)표시 즉 가우데의 차자는 8개의 중자로 둘러 쌓여 이었으며, 포장지의 가장자리 위쪽은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 아래쪽은 중차패원자라는 글자를 원형으로 배열하여 표기했다. 차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지방의 차잎으로 만들어진 원차의 차자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이라 했고,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차잎으로 제다한 원차의 차자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녹인이라 불렀다.
홍인푸얼원차는 40년대 국민당정부에서 생산된 초기홍인과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초기홍인은 이무차산의 최고품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이 품질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진짜 홍인푸얼원차의 차잎은 크고 알차며 줄기 또한 포만하고 차잎 표면이 반들반들한 윤기가 나며 색깔은 붉은 밤색이다. 우러난 탕색은 붉고 선명하며 맛은 매우 진하고 난초향기와 야생 녹나무 향기가 배어있다. 차찌꺼기는 연하고 싱싱하며 마치 두꺼비 껍질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구식의 나무모형으로 압축하여 제조했기에 중아부분이 부풀어 배꼽이 있는 것 같으며 8중차의 내비는 완전히 차 덩어리의 속에 묻혀 출하되어 있다.
한편 수량이 많지 않은 홍인철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소홍인이라 한다. 50년대초 공산정권의 운남성 하관차공장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개향식 금속 압축모형으로 만든 푸얼원차이다. 차잎 원료는 멀리 맹해 차공장에서 고급 차잎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생산되 푸얼차의 이름은 원차철병이다. 원차철병의 품질은 초깅홍인과 후기홍인 사이에 있고, 차의 향기는 초기홍인의 난초 향보다는 후기홍인의 야생 녹나무 향을 더 빼었다. 이에 따라 원차철병은 맑은 녹나무 향기가 물신 풍긴 대표적인 푸얼차 제품으로 자리잡는다.
녹인원차
녹인원차도 홍인원차와 마찬가지로 차 겉면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의 차자가 푸른 색이이기에 녹인이라 부른 것이다. 역사는 홍인과 같기에 40년대에 생산한 초기 제품과 50년대 이후에 생산한 후기 제품 등 두 가지로 나눈다.
초기녹인원차는 맹해 일대에서 나는 차잎으로 만들었다. 사모에서 파달흑산일대까지에서 생산된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차잎 원료의 질은 매우 좋다. 이무와 맹해에서 수거된 차잎 중에 으듬의 차잎은 갑급이라 정하고, 그 다음은 을급으로 나누어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녹인갑을워차 또는 남인푸얼원차라 불려지는 초기녹인은 녹나무 향기, 차의 묵은 맛은 상당히 좋으면서도 불구하고 시중의 가격은 홍인의 절반값에 유통되었다.
후기녹인원차는 50년대로부터 6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맹해차공장에서 만든 모든 푸얼차는 녹인상표의 표지를 달았기에 상당한 수량의 푸얼차가 생산되었다. 후기녹인은 그 차잎과 품질면에서 매년 수매한 차잎의 품질과 각 지방의 차잎의 질이 서로 다르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녹인원차의 명칭은 운남칠자병차라 바뀌었고 이에 따라 녹인원차의 상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이 1973년에 푸얼차의 쾌속진화 퇴적발효 제조공정 기술인 습창법의 연구가 성공되자, 칠자병차는 여러 등급의 관목형 차잎을 섞어 습창법으로 숙병을 만들었다.
포장지 없는 녹인은 50년대와 60년대 사이 20년간은 중국공산정권 사회에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특히 50년대 초반 때에 많은 무명 푸얼차 제품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생산방식에 따라 이 시절 출하된 푸얼차는 모두 나라의 재산이기에 상표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포장지를 절약하는 취지아래 포장하지 않은 채로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로 운반하여 팔았다. 맹해 차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자녹인원차는 포장지 없는 녹인의 후속제품으로 맹해차공장에서 50년대 초반에 출하되었다. 사용했던 차잎은 대체로 좋은 것이었으며 제조공정도 청병 방식에 건창법으로 만들어졌다.
소자녹인원차는 오늘날 자료도 기록도 없는 일정량이 유통되고 있다. 제품의 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며 야생 교목에서 자란 차잎으로 만든 청병에 건창법으로 저장되었기에 소자녹인원차는 자연적인 차향이 많이 나는 신선한 좋은 푸얼차라 할 수 있다.
황인원차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을 생산했던 시기에 포장지의 중차패 차자가 누른 색으로표시된 푸얼차 제품이 있었는데 후일 이것을 황인원차라고 부른다. 이때 생산된 황인원차 제품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덩어리가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대황인이라 하고 작은 것은 소황인이라 한다.
황인원차의 특징은 기존 다른 원차는 한 가지 차잎으로 만드는데 반해 황인원차는 여러 등급의 차잎으로 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차를 개조차라고 한다. 크고 둥근 것은 긴단차라 하고, 낙고 둥근 것은 여아차라 한다. 장사꾼들은 덩어리차의 겉표면을 등급이 좋은 부드러운 차잎으로 사용하고 속은 쇠고 거친 차잎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개조차라 한다.
황인원차의 제조 배합의 비율로 보면 늙은 차잎에 일정한 양의 어린 싹을 섞는 것이 특징이다. 황인원차의 표면에 유난히 많은 어린 차일 싹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런 싹두들이 진화를 거쳐 대부분 금황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황인원차의 덩어리 표면의 특징은 다른 원차보다 누른 색을 더욱 띄는 것이다.
황인원차는 비록 구식의 모형 압축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덩어리는 의외로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또한 제조 공정 중에서 어느 정도의 발효를 거쳤기에 푸얼차의 원래 향기가 소실되어 차성은 푸얼숙병의 특색이 있다. 희미하게 녹나무 향기가 남아있으며 수성이 부드럽고 달며 뒷맛 또한 달고 부드럽다.
복원창호
청나라 때 왕싱에게 바치는 푸얼공차의 차잎은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이 주된 원료였다. 이에 따라 의방차산에서 자란 소엽종 차잎은 청나라 말기 이전의 차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의방차구의 푸얼차 가게들이 무척 흥성하였으나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 고증할 수 있는 차가게의 상호는 오직 송운호와 원창호 두 가게뿐이다.
청나라 중기 이무산의 대엽종 푸얼차 사업이 활기를 띠자 의방차구의 소엽종을 주로 취급해왔던 원창호도 이에 가세해 이무의 상업거리에 분점을 개설하였다. 분점의 이름을 복원창호라 지었으며 이무산의 대엽종 차잎만 취급해 엄선한 차잎으로 만든 푸얼원차를 고급 차인들에게 공급하였고 해외시장으로도 수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접어들어 정세의 불안 및 치안부재, 유행성 질병까지 겹치자 푸얼차를 취급하는 모든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이 때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과 이무의 복원창호 분점도 같은 운명을 맞아 폐업하게 된다. 의방차구의 원창호 본점은 완전히 폐업한 반면 이무차그의 복원창호 분점은 1922년에 다시 개업한 차가게였다.
복원창원차는 동경노호와 쌍벽을 이루는 푸얼차의 극품이다. 차의 묵은 맛을 판단해 보면 동경노호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고, 포장인 죽순 껍질의 재질은 동경노호에 비해 떨어지지만 아주 좋은 재료에 속하며, 묶는 기술도 동경노호의 방법과 동일하다.
내비와 내표의 재질은 모두 오볼라토이기에 대부분 좀벌레가 먹어 완전한 형태는 보기가 어렵다. 또한 내표와 내비의 그림, 글자의 원판은 모두 인장을 새겨서 수공으로 찍어낸 것으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복원창원차는 이무정산 대엽종 차잎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푸얼차이기에 오늘날 중국의 푸얼차계에서는 복원창원차를 가리켜 푸얼차왕이라 극찬한다.
오늘날 의방차구의 원창로 본점에서 생산된 푸얼원차 제품을 볼 수 없으며 이무의 복원창호분점의 푸얼원차만 있는데 이도 또한 극소수의 푸얼차 수장가의 수중에 들어가 푸얼차의 유통 시장에서는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동경호
동경호차 가게는 1736년에 이무에 모차공장을 설립하였다. 동경호는 개점이후 약 200년간 줄곧 용마상표의 내표를사용했는데 1920년에 쌍사기도(雙獅旗圖)로 고쳤다. 1950년 중국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차가게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하자 동경호는 휴업을 선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50년대 폐업 이전의 동경호의 모든 제품은 가장 좋은 이무산의 야생 대엽종차잎, 일쇄, 건창 등 정통 제다법으로 만들어졌기에 오늘날 푸얼차계에서는 최고의 푸얼차로 대접받는다. 동경호의 명성이 커지자 당시 사용했던 용마상표인 내표를 본뜬 위조품이 나돌기 시작했다. 때문에 1920년 8월부터 내표의 모양을 쌍사기도로 변경한다. 따라서 오늘날 1920년 이전 용마상표를 내표로 사용했던 시기의 동경호 푸얼차를 동경노호푸얼이라 부르며, 폐업할 때까지 사용했던 쌍사기도푸얼차는 통상 동경푸얼차라고 부른다.
용마상표로 유명한 동경노호 푸얼원차는 따스한 3월 봄날의 이무산의 2,4,5등급의 어리고 부드러운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다. 둥근 형태는 비교적 넓고 직경이 약20cm, 무게는 340g이며 오랜기간의 저장을 걸치면 차의 겉면은 집은 밤색을 띈다. 현재 대부분의 동경노호원차는 대만의 보이차 수장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홍태창호
오늘날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는 홍태창호는 중국 운남성 의방 홍창호가 1930년대 해외 판매망의 거점하나로 태국 방콕에 설치한 지점의 제품이다.
초기 제품은 의방의 소엽종차잎 제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음 모두다 대엽종 푸얼차이다. 초기제품의 차잎은 단단하면서 가늘고 길었으며 차의 새순에 달린 가지의 색은 금황색을 띄우며 차 덩어리의 표면은 반들반들하였다. 우려낸 탕색은 밤색이고 수성은 담백하며 운남성 소엽종 차잎의 야생 청향이 짙게 뽐낸다.
근래 홍콩의 홍태창회사가 운남성에서 푸얼차잎을 수입하여 압제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품은 묵은 푸얼차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므로 선택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송빙호
송빙호 차상점은 청나라 광서 초기에 이무진에서 창립하였으며 많은 양의 푸얼차를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푸얼차시장의 송빙호 푸얼차 제품은 범람할 정도로 많으나 대체로 5%의 진품롸 95%의 가품들이 있다. 그러나 5%의 진품 송빙호푸얼차제품도 질이 무척 낮은 것이기에 건리정송빙호 또는 옛 송빙호시대에 만들어진 푸얼차를 발견하면 푸얼차의 진품 혹은 극품이라 대접을 받는다.
현재 푸얼차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가짜 송빙호 제품 종류는 대체로 5-6가지 된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푸얼차제품으로 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유통하는 것인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 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의 격동기에 생산된 푸얼차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표도 없이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에 운반하여 팔았다. 오늘날 소위 가짜 푸얼차라는 것이 이 시대에 생산된 이름 없는 푸얼차에 유명상표를 붙여 유통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교적 좋은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어 유명해진 맹해차공장에서도 이러한 상표 없는 제품들을 많이 출하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제품을 포장지 없는 녹인이라 부른다.
2)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재배형 관목푸얼차잎의 등장등의 원인에 의해 70년대 이후부터 많은 상인들이 동남아지역의 대엽종 차잎인 변경푸얼 특히 월남의 대엽차잎과 중국 광동성 지역에서 생산된 푸얼산차를 만들었다. 이 때 일부 악덕상인들이 인쇄한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가짜를 진짜처럼 유통하였고, 후일 묵은 대엽종 푸얼차가 선풍적으로 유행하게되자 이러한 제품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3) 홍콩에 설립되었던 송빙호의 지점인 복화호에서도 가짜를 만들었다. 초기에 주로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잎으로 푸얼차를 만들었으나 후일 중국 공산정권의 정세로 인해 부득이 월남지방의 대엽종 차잎을 구입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남아지역의 변경푸얼로 만들어진 푸얼차가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자 복화호지점은 중국 본점의 간리정송빙호의 내비, 내표를 붙여 속여 팔았다.
경창호
중화민국 초기 경창호 차가게는 운남성 강성지역세서 규모가 제일 크고 이름을 날닌 푸얼차가게 중의 하나였다. 경창원차는 푸얼정산 즉 만쇄차산의 제일 좋은 대엽종 차잎을 채집하여 만든다. 만쇄산은 라오스 접경지역의 위치에 있으며 옛 이무산의 북쪽 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쇄산의 차잎 품질은 이무차산의 다음 가는 으뜸제품이다.
경창원차의 대엽종 차잎 크기는 넓고 크다. 가지 또한 굵고 견실하며 특히 차잎은 마치 차기름에 담가두었던 것처럼 기름진 빛이 가득하고 황금빛의 차순이 발하고 있다. 압축 제조 기술이 정교하고 규칙적이며 가장자리의 두께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덩어리의 표면은 고르다. 덩어리의 직경이 20.5cm이고, 무게는 약330g이다.
가벼운 녹나무 향기에 차맛이 극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워 입안에 들어가면 즉시에 녹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이 푸얼원차 제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다. 각 덩어리에는 내비 한 장씩 있는데 타원형의 도안이며, 동경노호의 내비 디자인과 매우 유사하다.
예로부터 운남성 개인 차가게에서 만든 푸얼차 제품 중에서 동경호와 경창호의 푸얼원차의 제조 공정과 기술이 가장 정교하고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강성원차
1950년대 중국 공산정권 하에 차잎 수매지역에 따라 차잎의 가격을 매겼다. 운남성에서도 이를 따라 차잎의 품질을 통제, 기술 수준의 평등화 등을 통해 공정한 교역이 될 수 있도록 일률적인 가격을 정했다. 이때 강성현, 란창현은 모두 시쐉반나의 푸얼차 수매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강성현에서 자란 차잎은 시쐉반나(西雙版納)의 푸얼 차잎과 대등할 뿐만 아니라 품질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강성원차는 보경원차와 같이 오직 내표만 있고 내비는 없는 푸얼원차이다.
강성원차의 덩어리는 단단하며 직경은 19.5㎝이고 무게는 약 320g이다. 특수한 압축 기술로 인해 덩어리 평면이 고르지 않았고 가장자리의 두께는 녹색을 띄며 고르지도 않았다. 가지 줄기는 납작하고 길었으며 밤색나는 황색 빛깔에 차잎은 반지르하며 윤기가 난다. 전체적으로 경창원차와 매우 비슷하며 대뎝종 푸얼차잎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풍기는 녹나무 향은 비교적 약하나 묵은 청향이 짙어 상쾌한 맛이 난다. 차맛이 비교적 가벼우나 부드러우면서 순하기에 마시고 나면 진액이 생겨 좋은 푸얼차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푸얼차계의 일부 인사들이 강성원차를 가리켜 경창원차의 자매품이라고 말한다. 이는 강성원차도 경창원차와 같이 1930년대에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동흥호
동흥호 차가게의 옛 이름은 동순상호 또는 중신행이라 한다. 1733년 이무진에서 창립되었으며 1921년 전후 동경호와 같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이름을 떨쳤던 차가게였다. 그때 동흥호에서 생산된 푸얼차의 수량은 해마다 약 500담으로 이는 대형의 차가게에 속한다.
오늘날 동흥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권 하인 1921년부터 1934년 사이에 만든 것은 총상 동흥초기원차라 부르며 1934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정권 탄생이전까지 만든 것은 동흥후기원차라고 부른다. 양자의 차잎은 모두 의방차산의 만송다원에서 채취한 소엽종 차잎이기에 품질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동창호
동창호는 1869년 청타라 동치7년에 창립되었으나 청나라 말기 정국 불안으로 인하여 폐업했다.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바뀌고 푸얼차 시장이 점차 안정을 찾자 1921년 전후에 많은 차상점들이 이무차구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이때 새로 창업한 차가게들도 많았다. 그 중 주관보라는 차상인이 이무의 상업거리에서 동창호 차가게를 해로이 설립하여 이무정산의 푸얼차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1931년경 황문흥이라는 상인이 동창호를 인수하고 가게를 운영했다. 주인이 바뀌었어도 계속 동창호라는 상호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다만 원차의 내비의 낙관에 '주인 황문홍이 삼가 올림'이라고 고쳐 썼다.
오늘날 내비의 문구, 디자인의 색상에 따라 동창호 푸얼원차는 세 가지로 나눈다. 동창원차, 동창황기남원차, 동창황기홍원차 등이 그것이다. 1949년 경 황금당씨가 동창호를 인수할 때 상호를 동창황기라고 고쳤다. 이때 원차 내비의 디자인 도안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색의 내비, 하나는 붉은 색의 내비로 만들었다.
남색 내비의 낙관에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찍혀있는 것을 동창황기남원차라고 하고, 묽은 색 낙관에 같은 내용의 동창황기주인 삼가 올림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동창황기홍원차라고 말한다. 양자는 모두 약 50년 정도 묵인 푸얼원차이다.
전기의 동창원차의 덩어리는 두텁고 짙은 밤색을 띈다. 가지 줄기가 납작하면서 길고 흰 솜털인 백호는 거칠면서 두텁다. 줄기와 차잎이 정렬하게 혼합되어 있어 좋은 푸얼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동창원차는 다른 동창호 원차에 비해 겉 표면의 윤기가 좋다.
후기의 동창황기남원차의 외관은 전기의 동창원차와 아주 비슷하다. 빛깔과 윤기도 대체로 같으며 다만 가지 줄기가 좀 가늘고 차잎이 약간 마르게 보이므로 동창원차보다는 질이 떨어진 제품이다.
양빙호
오늘날 푸얼차 시장에서 양빙호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빙호를 소개하는 이유는 양빙원차는 의방차구의 소엽종으로 만든 푸얼원차이기 때문이다.
푸얼차를 논한다면 운남성 [6대차산] 즉 [이무차구-易武茶區]를 빼놓고는 애기 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6대차산]이란 西雙版納 내의 攸樂, 革登, 莽芝, 蠻專, 漫撤, 依邦 등의 차산을 말한다.
그러나 원, 명,나라부터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운남성의 6대차산의 이름은 오늘날과는 다르다.
이 시대에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이무산, 우곤당산 절반과 만랍산 절반을 합쳐 5대차산이라 했고, 후일 유락산 일명 공명산과 다시 합쳐 6대차산이라 불렀다. 이 중 만송산, 만공산, 만전산, 우곤당산 절반의 차산 등 전지역을 가리켜 의방차산라고 한다.
의방차산은 운남성 내에서 제일 먼저 소엽종 차잎을 재배한 차산이다. 운남성의 소여종 차잎은 명나라 말기 사천성 다농들이 이곳 의방차산으로 이주해 올 때 소엽종 차씨를 가져와 재배했던 것이다.
의방의 소엽종 차맛은 대엽종 푸얼의 진하고 두터운 맛의 특성을 가지면서 소엽종의 청향을 겸해 뒷맛이 달고 매끄럽다. 또한 여린 것이 늙은 것 보다 향기롭고 새것이 묵은 것 보다 진하며 싱싱한 것을 물에 울구어 마시기가 가장 적합하다.
양빙원차의 덩어리는 여타 푸얼원차 보다 비교적 작은 편이다. 직경이 19㎝이며, 무게는 약 280g이다. 매 덩어리마다 5×6.8㎝의 가로 내비가 한 장씩 있고 흰 바탕에 묽은 글씨로 되어있다. 덩어리 표면의 색깔은 어두운 밤색이고 차의 가지는 가늘고 작으면서 줄기가 있었으며 윤기가 나는 누른 싹도 보인다. 차탕은 청향이 나고 차맛은 진하지 않으나 약간 신맛이 섞여 있어 의방 소엽종 푸얼차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푸얼원차이다.
홍인원차
홍인원차를 논하고자 하면 범화균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40년에 운남성 불해에 임시로 공장 건물을 세우고 민들들로부터 품질 좋은 야생차잎을 사들여 처음으로 푸얼원차를 제조하였다. 그중 시험적으로 제조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홍인푸얼원차와 녹인푸얼원차 등 푸얼차제품이다.
이 때 원차의 겉면 포장지의 정 중앙에는 8중차(8中茶)표시 즉 가우데의 차자는 8개의 중자로 둘러 쌓여 이었으며, 포장지의 가장자리 위쪽은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 아래쪽은 중차패원자라는 글자를 원형으로 배열하여 표기했다. 차잎 원료의 산지를 구별하기 위해 맹랍지방의 차잎으로 만들어진 원차의 차자는 붉은 색으로 표기하여 홍인이라 했고, 맹해부근에서 구입한 차잎으로 제다한 원차의 차자는 푸른색으로 인쇄하여 녹인이라 불렀다.
홍인푸얼원차는 40년대 국민당정부에서 생산된 초기홍인과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생산된 후기홍인제품으로 나누어진다. 40년대의 초기홍인은 이무차산의 최고품 대엽종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품질이 우수한 반면 후기홍인 제품은 50년대 공산정권 아래서 제조한 것이 품질면에서 많이 떨어진다.
진짜 홍인푸얼원차의 차잎은 크고 알차며 줄기 또한 포만하고 차잎 표면이 반들반들한 윤기가 나며 색깔은 붉은 밤색이다. 우러난 탕색은 붉고 선명하며 맛은 매우 진하고 난초향기와 야생 녹나무 향기가 배어있다. 차찌꺼기는 연하고 싱싱하며 마치 두꺼비 껍질모양으로 되어있다. 특히 구식의 나무모형으로 압축하여 제조했기에 중아부분이 부풀어 배꼽이 있는 것 같으며 8중차의 내비는 완전히 차 덩어리의 속에 묻혀 출하되어 있다.
한편 수량이 많지 않은 홍인철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소홍인이라 한다. 50년대초 공산정권의 운남성 하관차공장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개향식 금속 압축모형으로 만든 푸얼원차이다. 차잎 원료는 멀리 맹해 차공장에서 고급 차잎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생산되 푸얼차의 이름은 원차철병이다. 원차철병의 품질은 초깅홍인과 후기홍인 사이에 있고, 차의 향기는 초기홍인의 난초 향보다는 후기홍인의 야생 녹나무 향을 더 빼었다. 이에 따라 원차철병은 맑은 녹나무 향기가 물신 풍긴 대표적인 푸얼차 제품으로 자리잡는다.
녹인원차
녹인원차도 홍인원차와 마찬가지로 차 겉면 포장 종이에 찍힌 8중차의 차자가 푸른 색이이기에 녹인이라 부른 것이다. 역사는 홍인과 같기에 40년대에 생산한 초기 제품과 50년대 이후에 생산한 후기 제품 등 두 가지로 나눈다.
초기녹인원차는 맹해 일대에서 나는 차잎으로 만들었다. 사모에서 파달흑산일대까지에서 생산된 차잎으로 만들어졌기에 차잎 원료의 질은 매우 좋다. 이무와 맹해에서 수거된 차잎 중에 으듬의 차잎은 갑급이라 정하고, 그 다음은 을급으로 나누어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녹인갑을워차 또는 남인푸얼원차라 불려지는 초기녹인은 녹나무 향기, 차의 묵은 맛은 상당히 좋으면서도 불구하고 시중의 가격은 홍인의 절반값에 유통되었다.
후기녹인원차는 50년대로부터 6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맹해차공장에서 만든 모든 푸얼차는 녹인상표의 표지를 달았기에 상당한 수량의 푸얼차가 생산되었다. 후기녹인은 그 차잎과 품질면에서 매년 수매한 차잎의 품질과 각 지방의 차잎의 질이 서로 다르다. 6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녹인원차의 명칭은 운남칠자병차라 바뀌었고 이에 따라 녹인원차의 상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욱이 1973년에 푸얼차의 쾌속진화 퇴적발효 제조공정 기술인 습창법의 연구가 성공되자, 칠자병차는 여러 등급의 관목형 차잎을 섞어 습창법으로 숙병을 만들었다.
포장지 없는 녹인은 50년대와 60년대 사이 20년간은 중국공산정권 사회에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특히 50년대 초반 때에 많은 무명 푸얼차 제품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생산방식에 따라 이 시절 출하된 푸얼차는 모두 나라의 재산이기에 상표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포장지를 절약하는 취지아래 포장하지 않은 채로 대나무 광주리 혹은 큰 나무 박스에 넣어 각지로 운반하여 팔았다. 맹해 차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자녹인원차는 포장지 없는 녹인의 후속제품으로 맹해차공장에서 50년대 초반에 출하되었다. 사용했던 차잎은 대체로 좋은 것이었으며 제조공정도 청병 방식에 건창법으로 만들어졌다.
소자녹인원차는 오늘날 자료도 기록도 없는 일정량이 유통되고 있다. 제품의 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며 야생 교목에서 자란 차잎으로 만든 청병에 건창법으로 저장되었기에 소자녹인원차는 자연적인 차향이 많이 나는 신선한 좋은 푸얼차라 할 수 있다.
황인원차
50년대말 후기홍인과 후기녹인을 생산했던 시기에 포장지의 중차패 차자가 누른 색으로표시된 푸얼차 제품이 있었는데 후일 이것을 황인원차라고 부른다. 이때 생산된 황인원차 제품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덩어리가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대황인이라 하고 작은 것은 소황인이라 한다.
황인원차의 특징은 기존 다른 원차는 한 가지 차잎으로 만드는데 반해 황인원차는 여러 등급의 차잎으로 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차를 개조차라고 한다. 크고 둥근 것은 긴단차라 하고, 낙고 둥근 것은 여아차라 한다. 장사꾼들은 덩어리차의 겉표면을 등급이 좋은 부드러운 차잎으로 사용하고 속은 쇠고 거친 차잎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개조차라 한다.
황인원차의 제조 배합의 비율로 보면 늙은 차잎에 일정한 양의 어린 싹을 섞는 것이 특징이다. 황인원차의 표면에 유난히 많은 어린 차일 싹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런 싹두들이 진화를 거쳐 대부분 금황색으로 변한다. 따라서 황인원차의 덩어리 표면의 특징은 다른 원차보다 누른 색을 더욱 띄는 것이다.
황인원차는 비록 구식의 모형 압축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덩어리는 의외로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또한 제조 공정 중에서 어느 정도의 발효를 거쳤기에 푸얼차의 원래 향기가 소실되어 차성은 푸얼숙병의 특색이 있다. 희미하게 녹나무 향기가 남아있으며 수성이 부드럽고 달며 뒷맛 또한 달고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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